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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5 14:32 수정 : 2018.05.15 19:22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8월 6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에게 각기 딸을 시집보낸 부모가 가지는 걱정, 그것은 경제정책의 입안자들이 지닌 고민의 내용을 아주 잘 설명해 준다. 우산과 나막신을 파는 데 고루 이로운 날씨가 없듯이, 한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두루 유익한 경제정책이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의 계급적 성격

그래서 예컨대 미국의 쇠고기가 수입되면 우리나라의 양축농가는 초상이 나지만, 국내의 쇠고기 소비자들은 다소 덕을 보고, 나아가서 미국에 텔레비전이나 자동차를 수출하는 기업들은 막대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물론 자동차 수출에 따르는 이익이 축산농민들에게 입히는 피해보다 훨씬 더 크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하지만, 그야말로 그것은 그들이 작성한 기념축사에 불과할 뿐이지 당하는 편의 사정이 반드시 그와 같을 수는 없다. 요컨대 모든 계층에게 똑같이 공평하고 온갖 이해에 꼭 같게 중립적인 경제정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각종의 정책들이 수립되고 집행되는 그 지향성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대강 정권의 계급적 성격이나 혹은 그 고민을 짐작하게 된다.

절망과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집권의 명분으로 내건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 ‘성장 우선’의 기치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장이 정책목표의 제1순위가 되면서 정치 권력과 외국자본의 비호를 받는 독점기업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마침내 성장 만능의 정부 의지를 철저하게 추진하는 주역으로 행세하고 나섰다. 그러므로 종합상사나 재벌그룹 등 성장의 총아들이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을 ‘경제적으로’도운 것은 피차간에 필요한 절차였다. 그러나 그 독점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온갖 비리와 갈등의 위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고 말았다.

군사정권과 독점자본 형성

제동장치에 이상이 있는 차를 과속으로 과속으로만 몰고 가다가 변을 당한 박정희의 비극적 종말을 곁에서 목도한 전두환 정권이 ‘안정 우선’의 구호를 외친 것은 일의 순서로 보아 당연한 대비였다. 사회는 발전해가는데, 말하자면 ‘민주화’로 표현되는 다양한 계층들의 요구가 증폭되는데, 정권 내부에서 그것을 수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안정 지향의 염불은 현실에의 안주로 고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경제정책의 효과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계급 중립적’안정이 아니라 독점기업에 대한 기존의 막대한 특혜를 그대로 인정하는 ‘재벌 편향적’안정이었다. 더구나 고문과 살인으로 대표되는 권력 행사의 부도덕성이나 전두환 씨 주변의 파렴치 행위들은 본래 그의 편으로 규합할 수 있었던 계층이나 집단까지도 이탈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뒤이어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정통성의 시비에서는 일단 해방되었지만, 이미 폭발한 민주화의 열기를 제도권 내부로 수렴해야 하는 작업을 당면과제로 안게 되었다. 민주화로 표현되는 시대적 요청 속에는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다소 급진적인 개혁에의 외침도 상당한 정도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 정권이 선택한 ‘복지 우선’의 지표는 사회를 통합한다는 적극적인 기능도 갖고 있으나, 반면에 통합을 빙자해서 특정 계급의 요구를 희석시키거나 중화시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불러올 수도 있다.

'한 개의 밀알' 동화는 허구

여하튼 복지문제가 거론되고 또 그 결실이 거두어지기 위해서는, 한국 자본주의의 물질적 기반이 그것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성숙했느냐는 ‘사실의 점검’과 동시에 현재의 정부가 독점재벌만을 정권 안보의 동반자로 지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제 사회의 생산력은 같이 나누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발전했고, 더구나 ‘한 개의 밀알’의 동화가 완전히 거짓으로 판명된 지금, 복지에 관한 한 정치 권력의 의지와 결단만이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1970년대 대두되었던 ‘성장이냐 안정이냐’의 토론이 결국 정권의 유지를 위한 방법론적 논쟁에 지나지 않았듯이, 지금 재현되고 있는 ‘안정이냐 복지이냐’의 대립 또한 이론의 승패로 판가름 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미 튼튼하게 자본축적을 이룬 기업이나 단단한 생활 기반을 잡은 개인에게는 안정이 선거의 득표율을 좌우할 만한 절대적 요망사항이기 때문에 과거의 수고와 노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수반하는 성장지향적 복지의 개념이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사대에 찢기고, 중금속 오염에 온몸이 썩어가고 그리고 마침내 열네 살의 나이로 삶을 하직해야하는 ‘인생들’은 어차피 그런 팔자를 타고 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방관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물론 우리는 안정 없이 복지 없다는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복지 없는 안정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지없는 안정의 반시대성

그렇다면 한때 경제관료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거론되었던 안정과 복지의 논쟁은, 시정에 유포된 잡된 풍문처럼 복지론자가 안정론자를 몰아낸다거나 혹은 그것을 되받아친다는 차원이 아닌, 말하자면 이 싯점에서 어느 계층이나 어느 집단에 가장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느냐는 방향으로 그 시각의 조정이 필요하다. 사람은 두 개의 귀를 가졌기 때문에 오른쪽 귀로 안정을 듣고 왼쪽 귀로 복지를 들을 수 있지만, 다만 하나의 입을 가졌기 때문에 안정을 외치던 입으로 복지를 강조할 수는 없다. 만약에 아직도 안정을 지키기 위해 복지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그는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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