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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5 15:04 수정 : 2018.05.15 19:20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9월 27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1936년 당시의 미국을 무대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현대'를 오늘까지 그대로 연장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미 2백50여 년 동안 상승과 하강을 교대로 체험하며 성장해 온 자본주의는, 그에 앞선 어느 제도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물질적 풍요를 인류에게 베풀었으나, 1930년대의 미국경제가 폭로했던 '대공황'에 휩쓸려 완전히 좌초하고 말았다. 증권시장이 무너지고,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는 밥과 일자리를 외치면서 거리를 메우고, 경찰은 예의 방망이와 '닭장차'로 그 강인한 삶의 몸짓들을 저지하고, 붉은 수건을 흔들었던 한 무고한 시민은 불순분자로 끌려가고…. 물론 '구사대'는 발명되기 전이었다. 이러한 생존의 황폐한 현장들을 채플린의 카메라는 일체의 언어를 생략한 채 '현대'의 배경으로 잡아 나갔다.

때때로 어느 상황에서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포연이 가득한 전장에서 생환한 병사의 훈장처럼 자랑을 삼아야 할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자본이 생활과 사회의 최고 가치로 등장하던 시대에 노동자는 바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하는 기계'나 혹은 '말하는 동물'이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우리의 어수룩한 듯 엉큼한 주인공 찰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밥이 없는 사회 대신에 밥이 있는 감옥을 선택하는 길이 있다. 감옥에는 적어도 실업이 없어서 안심할 만했으나 드디어 어느 날 감옥으로부터의 '해고'가 결정되자, 엉큼한 듯 어수룩한 그는 이 부당한(?) 처사를 한사코 거부한다. 아아, 우리의 선량한 찰리여! 채플린 감독의 그 비정한 계산과 능란한 술수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미리 정해 놓지 않은 관객들은 여기서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직장이 없는 노동자에게는 감옥만이 자유롭다는 이 통렬한 야유에 물론 모두가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 파울 괴벨스는 엉뚱하게도 표절을 이유로 이 영화를 고발했고,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는 그 '불온한' 제작자 채플린에게 분노와 앙심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노동자는 기계의 나사인가

경제에서 시간은 돈이고, 돈은 시간을 수탈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러므로 노동력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사회에서, 즉 몸뚱이 하나로 벌어먹어야 하는 사회에서 얼마를 일하고 얼마를 쉬느냐는 문제는 노동자에게는 생존의 조건으로 환산되지만, 그것을 고용하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오직 얼마를 벌어 주고 얼마를 잃게 하느냐는 화폐의 수량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사회과학자들이 즐겨 쓰는 계급투쟁이란 으스스한 용어의 경제적 의미는 요컨대 주어진 노동시간에 보다 많은 임금을 달라는 요구와 보다 적은 임금을 주겠다는 대답 사이의 갈등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시 일정한 임금수준에서 더 긴 시간의 노동을 강요하는 자본가의 이해와 더 짧은 시간의 노동을 제공하려는 노동자의 이해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허구적인 자본주의식 능률

국제노동기구(ILO)는 주당 40시간의 노동을 의무조항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고용기회 확대의 한 방편으로 35시간까지 단축한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은 주당 48시간으로 그 한도를 규제하고 있으나, 경제기획원의 조사에 따르면 주당 노동이 56시간을 웃돌아 우리는 세계의 어느 문명국가도 감히 깨뜨릴 수 없는 아주 '믿음직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여하튼 사람의 신체적인 한계나 노동자들의 '의식화'의 진행으로 노동시간의 절대적인 연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미 체결된 '계약노동 시간' 안에서 '실질노동 시간'을 확대하는 방도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 하나로는 예컨대 식사시간을 자르거나 혹은 '화장하는' 휴식을 줄이는 방법이, 아니 가능하다면 모든 노동자를 먹지도 배설하지도 않는 '천사'로 만드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하나로는 1분에 열 번 두드리던 망치를 스무 번 두드리게 하는 방법이 있다.

사람 잡는 과학적 착취기법

바로 이 이야기가 '현대'의 압권을 이룬다. 점심시간을 줄이기 위해 손은 일하면서 입은 먹는 자동급식기계가 고안되고, 그리고 화장실이란 그 완전한 평화와 안식의 장소에서 담배 한 대를 붙이려던 우리의 찰리는 폐쇄회로의 감시장치를 통해 들려오는 오(!) 그 이름도 그럴싸한 '원맨' 사장의 호통에 초풍을 하고 작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제로 이러한 고안들이 모두 '자본주의적 능률'이라는 이름의 허구를 고발하기 위해 분투한 한 천재의 기발한 착상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이름을 본뜬 자동차회사를 세워 크게 출세한 헨리 포드는 자기의 공장에 희한한 두 가지 작업원칙을 도입했는데 그 하나는 '모든 작업자는 일보 이상 움직여서는 안 된다'였고, 다른 하나는 '모든 작업자는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한발짝 이상 움직이고 허리를 굽힘으로써 '낭비하는' 시간을 방지해서, 즉 실질노동 시간을 그만큼 확장해서 그 절약된 부분을 생산에 투입하려는 발상의 산물이다. 뒷날 그것은 '과학적 관리기법'이란 기막힌 이름으로 포장되어 현재의 경영학 교과서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실제 그 내용에서는 요컨대 '사람 잡는' 과학적 착취기법이라고 비판당할 부분이 많았다. 소위 이 '포드주의' 아래서는 모든 노동자가 일관작업대(컨베이어 벨트)의 나사 조이는 부속이 되며, 기업주는 작업대의 진행속도를 올리고 내림으로써 그 '부속'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장치가 겉으로는 계약된 노동시간을 지키면서 안으로는 더 많은 일을 시키려는 수법들로써, 경제학에서는 그것을 '노동의 집약도' 혹은 '노동 강도'의 상승이라고 부른다.

흑백을 적색화한 매카시즘

채플린은 이 비극을 육중한 기계와 커다란 톱니바퀴들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찰리의 희극으로 풍자했다. 그것은 곧 포드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더구나 파업 항의 중에 아버지를 잃고, 선원들의 바나나를 훔쳐 굶주리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운동권' 출신의 소녀(이 폴레트 고다르는 25년 연하의(!) 채플린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의 설정 등 이 영화가 미국자본주의를 거스른 대목은 많았다. 분명히 채플린은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었지만, 허스트 계열의 신문이나 후일 매카시즘의 선동자들은 굳이 그것을 '적색'으로 보려고 했다. 그래서 채플린은 미국을 떠났고 그의 영화는 극장을 떠나야 했다. 물론 그것은 미국만의 극장이었다.

이미 반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현대'의 그 상징적인 마지막 장면이 끝나기도 전에 한국의 관중은 예술가에게는 최대의 경의인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 야당의 총재는 근로자들을 초대해 같이 감상했다고도 들린다. 무엇을 보았을까? 체력이 국력이라는 시대에 노동력이 국력이란 '이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이 영화를 한참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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