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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5 15:11 수정 : 2018.05.15 19:20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10월 27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것은 조금 잘못한 짓이지만 노벨상을 세운 것은 크게 잘못한 짓"이라는 어느 익살꾼의 얘기가 있다. 그런데 후인들이 다시 노벨경제학상을 설립함으로써 노벨의 '큰 잘못'을 '더 큰 잘못'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면 익살이 지나친 것일까?

상이란 무릇 받은 사람보다는 못 받은 사람이 많은 법이기 때문에 으레 여러 가지 구설수가 따르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이따금 엉뚱한 대상을 수상자로 결정함으로써 준 사람은 마음이 떨떠름하고, 받은 사람도 기분이 찜찜하며 그리고 옆에서 보는 사람마저 입맛이 씁쓸한 때가 더러 있다. 말하자면 1973년 북베트남의 레 둑 토 특별고문과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공동으로 돌아간 노벨평화상이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여하튼 전쟁을 도발하고 폭탄을 퍼붓는 쪽과 생존과 자존을 확보하기 위해 피눈물 나게 저항하는 쪽에 '공평하게', 그것도 평화상을 수여하겠다는 결정이 전해지자 좀 덜 점잖은 사람들은 깔깔대며 박장대소를 했고 좀 더 점잖은 사람들은 문을 닫고 낄낄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레 둑 토는 수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행하게도(!) 아직 경제학상을 거부하고 나선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그 수상자의 선정에는 입속이 떫어질 요소가 많이 있다. 다소 도식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발간으로부터 친다면 경제학의 역사는 이제 대략 2백년이 되는 셈이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부침이 무성했으나 대체로 고전학파, 신고전학파, 마르크스학파, 케인즈학파 등 네 개의 이론적 계보가 그동안의 역사를 주도한 중요한 흐름이었다. 그런데 1969년에 시작된 노벨경제학상은 올해로 꼭 20주년이 된다. 노벨의 유산으로 1901년부터 시상해 온 다른 부문과는 달리, 경제학상은 1968년에 스웨덴은행이 창설 3백주년을 기념하여 희사한 기금으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명예는 노벨이 내고 돈은 은행이 댄 그 치밀한 '음모'가 노벨경제학상으로 탄생한 셈이다.

혹시 수상자의 이름을 빌려 시상자의 권위를 높이려는 계산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발상이 이 상의 참신성을 크게 깎아내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노벨상의 시상규정에는 “전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베푼 사람에게”수여한다는 조목이 있다. 여기의 '가장 큰 이익'의 조항은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전해에'라는 조항은 적어도 경제학상에서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수상 당시의 평균 연령이 67세를 넘어, 대부분의 경우 이미 현역에서 은퇴했거나 왕성한 학문활동을 거의 중지한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난해의 '업적' 대신에 과거의 '공로'가 선정 기준으로 채택될 경우, 대단히 실례의 표현이지만 언제 그 재고정리(?)가 끝날지 알 수 없으며 또한 그 복고취미가 끝날 때까지는 항시 '그 밥에 그 나물'일 수밖에 없게 된다.

노벨경제학상은 그동안 7개국에서 모두 26명의 수상자를 냈는데, 발표 당시의 국적의 따르면 미국인이 15명 그리고 영국인이 5명으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영국 국적의 미국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하이에크와 루이스를 감안한다면 미국 우위의 비율은 더 크게 기운다. 한마디로 미국 자본주의의 세도가 등등할 때에 그 경제학의 자세(藉勢)가 우심한 것은 정한 이치이겠으나, 그 불균형은 누가 어떻게 보아도 이미 '양해 사항'의 정도를 넘고 있다. 실상 영국만 해도 고전학파, 신고전학파 및 케인즈학파 경제학의 발상지이며 그리고 또 마르크스의 무덤(!)을 관리하고 있는데 미국에 비해 그 대접이 너무 초라하다. 더구나 경제학 교과서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을 제치고 경제학 인명사전에서조차 찾아내기 힘든 인물(예컨대 사이몬)들을 선정한 행위는 그대로 노벨경제학상의 지역적 편협성과 이론적 편파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수상자 올린 이 앞서 여러 차례 이상의 심사위원장을 지냈던 사실에서 다소 냄새가 나듯이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텃세'(홈그라운드)를 인정해야 한다면, 결국 지난 20년 동안 네덜란드와 소련과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을 그저 '구색으로' 한 번씩 이 행사에 끼워 주었을 뿐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당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수상자들이 철저하게 신고전파 이론가들 일색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노벨경제학상의 이념적 편향을 간파할 수 있다. 제도적인 접근을 시도한 학자로는 유일하게 틴베르헨이 들어 있고 토빈 정도를 제외한다면 케인즈학파까지도 전멸이다. 자원의 적정배분으로 수상한 칸토로비치는 '소련의 신고전파' 경제학자인데, 그의 선정은 말하자면 그쪽의 '이단'을 이쪽에서 상까지 주어가면서 격려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한편으로는 경제학에서 정치적-사회적 내용을 삭제하고 그것을 오로지 수학적-통계적 기술로 규정하려는 노벨상 심사위원회의 완고한 보수성에 책임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체제 옹호의 이데올로기와 운명적으로 결탁된 신고전학파 방법론을 의도적으로 지원하려는 치밀한 계산과도 관계가 깊다.

노벨경제학상의 '오늘'을 이렇게 '회고적 편파적 보수적'으로 정리하는 우리의 평가가 다소 너그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의 심사위원들)의 결정이 그렇다면 굳이 탓할 생각도 없다. 다만 예컨대 동구의 시장사회주의 이론가나 남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이름이 당분간 그 수상자의 명단에 오르진 않더라도 크게 섭섭해하지는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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