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11월 22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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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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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더즈(혹은 플랑드르)는 현재의 벨기에 서부와 네덜란드의 남부 일대를 포함한 이른바 '저지대'를 가리키는 말로서, 본래 '범람의 땅'(플러디드 랜드)이란 어원을 지니고 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고급의 양모 생산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높였으나, 그 후 급격히 쇠퇴하여 지금은 브뤼즈 지방의 양탄자나 자수 공예품으로 그 번창했던 과거에의 향수를 달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난날의 영화만을 기억하고 이 지방을 찾는 나그네들은, 마치 빛바랜 옛 잡지책에서 흘러간 명배우의 사진을 보는 것만큼이나 심란한 비감에 잠기게 된다.
망하려 들면 망하게 만드는 사단이야 얼마든지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이 플란더즈의 불운에도 물론 정치적, 종교적 혹은 경제적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개입했다. 그중에서도 양모의 자체 생산보다는 영국 모직물의 수입에서 더 큰 이문을 남기려던 플란더즈 상인들의 약삭빠른 계산으로 말미암아, 국내의 생산기반이 파괴되고 또한 그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하게 된 경제적 동기가 가장 결정적인 타격으로 작용했다. 그 후 영국은 이 모직물 공업을 바탕으로 가장 먼저 자본주의로 이행했으나, 양 떼들이 자취를 감춘 플란더즈 초원은 점차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생산'을 포기하고 '무역'을 선택한 인간의 무지와 오류에 대한 역사의 가혹한 심판이며 또한 처절한 보복이었다. 198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클로드 시몽은 예컨대 기억과 의식이 마주 왕래하고 자유와 죽음이 서로 충돌하는 애매와 혼돈의 상징으로서 <플랑드르 가는 길>을 설정했는데, 혹시 거기에는 이와 같은 상념이 잠재적으로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생산 대신 무역 선택한 죗값
지난 17일 1만여 명의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및 제값 받기 전국농민대회'의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이 플란더즈의 부침을 되새기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몇 푼의 돈을 더 탐내어 생존의 대계를 그르쳤던 7백여 년 전 플란더즈 상인들의 그 멍청한 소행들이, 무분별한 농축산물의 도입으로 국내의 생산기반이 뭉텅뭉텅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그 알량한 비교우위 타령을 늘어놓고 있는 한국의 농정 관계자들의 한심한 작태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서고, 죽으라면 죽는시늉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흙의 가르침대로 묵묵히 인내와 아량을 솔선해 왔던 농민들이 마침내 미국에 분노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항의하게 될 때까지 이 나라의 농축산 정책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여하튼 이제는 그것들이 모두 좌경용공세력의 불온한 사주 때문이라고 모가지를 외로 빼고 버틸 수만은 없게 되었다.
얼마 전에 미국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고층건물에 재목의 사용을 금하고 있는 한국의 건축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해 왔다. 미국의 목재를 팔기 위해서란다. 허허, 그것참, 허허허. 그런데 이번에는 쌀을, 한국 내에서 완전히 자급되는 그 쌀을 수출하려는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에스키모에 냉장고를 안기고, 폴리네시아 원주민에게 난로를 팔아먹을 엄두를 내는 게 자본이니까, 그 힘을 배경으로 비록 한국에 쌀이 남아돌지라도 다시 미국 쌀을 수출하려는 '음모'를 꾸민대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쌀의 생산보조금과 이중곡가제를 폐지하고 미국 쌀에 대한 수입을 개방하라는 '체면몰수'의 압력을 넣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또한 국내 생산비가 국제 수준의 4배에 이른다는 그토록 '비효율적'인 쌀농사를 그만 짓거나 혹은 양특계정에 적자만 쌓이는 추곡수매라는 그 귀찮은 절차를 없애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채비 갖춘 쌀 수입 압력
그러나 잠시 고쳐 생각하면 그게 그렇지 않고, 또 그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가격? 지금 한 근에 2천 원인 고추가 10년 전에는 7천 원으로 팔린 적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와 같이 금값에서 변(便) 값으로 떨어진 데에는, 예컨대 개방의 여파로 파산한 담배경작 농가들이 일시에 고추 생산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입증하듯, 실제로 정부의 정책적인 실수가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농산물 가격의 변동과 그 추세는 안심하고 믿을 것이 못 된다. 보조금? 미국은 해마다 농작물의 생산보조금으로 2백50억 달러, 그리고 그 수출보조금으로 1백1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시장개방? 미국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가트)의 소위 면책조항을 악용해 1955년 이래 아직까지도 설탕 면화 낙농제품 등에 대해 철저한 수입제한조치를 펴고 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유럽공동체에 의해 지금 가트에의 제소를 위협받고 있다. 생산비 비교? 비용을 따져서 거래할 물건이 있고, 그렇지 못할 대상이 있다. 아 글쎄, 소련의 미사일 가격이 싸다고 해도 미국이 소련의 미사일로 무장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의 쌀값이 싸다고 해서 한국도 미국의 쌀에다 국민들의 목숨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분별 잃은 개방정책 바꿔야
가격 시비, 보조금 시비, 시장개방 시비, 비교생산비 시비의 이면에는 이와 같이 정직하지 못한 요인들이 잔뜩 감추어져 있다. 이제 미국 쌀 먹고, 미국 쇠고기 뜯고, 미국 포도주 마시고, 미국 담배 피우고…그래서 마침내 배설까지도 '미제'로 하게 된 판국에, “미국 농민 살찌우는 개방정책 물러가라”는 농민대회의 구호는 아주 절실하고 실로 정당한 요구였다.
플란더즈는 이제 소년과 늙은 개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린 위다 여사의 명작동화 <플란더즈의 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을 뿐이다. 무척 실례되는 말씀이나, 플란더즈의 상인들이 플란더즈의 개만큼도 현명하지 못했던 것은 몹시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더욱 더 불행한 일은 그것이 절대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혹시 또 알겠는가? 7백 년, 아니 70년 후의 어느 관광 안내자가 “이 한반도의 주민들은 한때 논에서 쌀을 거두고 들에는 소를 기르며 부지런하게 살았읍니다만, 분별없는 수입개방의 결과로 쌀이 떨어지고 소가 사라지고 그리고 드디어 사람의 '생활과 경제'가 완전히 황폐해져서, 지금은 올림픽 경기를 치르기 위해 만들었던 그 을씨년스런 운동장 외에는 달리 보여드릴 게 없읍니다”라는 씁쓸한 소개를 되풀이해야 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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