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5 15:46
수정 : 2018.05.15 19:18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12월 7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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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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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 '꼬추'라고 한번 써보소.”
“예?”
“우리가 양념으로 쓰는 채소 안 있소? 그걸 우리 글로 써보라니까.”
말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으리라는 짐작은 했지만, 여하튼 나는 아는 대로 '고추'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정 선생도 수입 고추만 먹은 모양이구려. 한 번이라도 '꼬추'모를 땅에 꽂아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냥 '고추'라고 읽을 수가 없지요.”
고추에 사무친 농민들의 그 간절한 '원과 한'을 잠시만이라도 생각한다면 그것을 결코 '고추'라는 '부드러운' 말로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번에는 또 '까시'에 걸렸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대로 정직하게 '가시'라고 써냈지만, 그분은 다시 “한 번이라도 '까시'에 찔리는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시'라고 쓸 수 없는 법이제”하고 일러주었다. 담소 중의 한바탕의 재담으로 돌리기에는 그 내용과 의미가 너무 무거웠다. 특히 '미친' 역사가 할퀴고 지나간 한때의 상처로 인해 그 장구한 회한의 세월을 흙 속에 묻고 있다는 그분의 과거를 얼핏 들은 적이 있기에 그 말씀은 독한 담배 연기처럼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난 1일 안동의 '한겨레 대강연회'를 끝내고 자리를 같이했던 한 작은 모임에서 있은 일이었다.
'분노의 고추'에 얽힌 사연
안동은 실제로 농민운동 교사운동 청년문화운동이 아주 활발했는데, 그 활력이 그대로 경상북도 북부의 4개시 12개군의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모태가 되고 있었다. 그저 하루 저녁을 묵어 가는 나그네로서는 그 과정에 바쳐진 숱한 고뇌와 희생의 부피를 다 헤아릴 수 없겠으나, 다만 그들이 지금까지 치열하게 전개해 온 투쟁에 대한 떳떳한 자부와 그 투쟁이 마침내 일구어낼 결실에 대한 완강한 신념만은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척박한 토지에서 벗어나 출세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닦은 '선비의 학문'에 못지않게 그 메마른 흙을 가꾸며 줄기차게 싸워 온 '민중의 삶'이 보다 중요한 게 아니냐는 어느 참석자 한 분의 지적에, 이 고장이 낸 인물을 찾기 위해 그 전날 퇴계와 서애의 행적을 백과사전에서 더듬었던 '먹물'의 옹졸한 발상을 크게 후회했다.
더구나 그곳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을 위한 기금모집에 열중하다가 지난 1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박경서 씨의 사모님 이교철 선생이 참석했었고, 그리고 그날이 마침 결혼 2주년 기념일이어서 그분의 내밀한 오열은 사연을 아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찢었다. 그 잔인한 처사의 '숨은 뜻'은 하늘의 원대한 '계획'에 미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줄곧 수석을 다툰다는 '한겨레 소년' 박영대 군이 “새벽에 신문을 돌리노라면 추워서 겨드랑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 <한겨레신문>은 한번 훑어보고 픽 던지지 말고 한 자 한 자 끝까지 읽어 주이소”라며 해맑은 얼굴로 간곡히 부탁했을 때는 장내가 온통 숙연했었다. 내 소년시절의 고통과 애정이 담긴, 그래서 이제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된 그 신문을 천대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뜻이리라. 거기서, 바로 그런 데서 나는 '한국경제의 당면과제'라는 거창한 주제를 놓고 참으로 변변치 못한 몇 가지 얘기를 했다. 그 오죽잖은 말씀을 들으러 백여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신 많은 분들에게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그 불신의 벽은 누가 쌓았나
부부라는 사실이 주민등록증으로 확인되어야만 동숙이 허용된다는 그 삼엄한(!) 여관방에서 6시에는 떠나야 할 나에게 새벽 4시가 넘도록 '하방'(下放)의 가르침을 준 것은 주로 농촌문제에 대해서였다. “정부에서 뭐라 해도 우리의 계산으로는 고추 한 근의 생산비는 2천 원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1천 원 아래로 떨어진 적도 있으니 우리는 도대체 우예 삽니꺼”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 과녁은 분명히 내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꼬추'아닌 고추를 먹는 도시의 소비자인 내가 거기서 제외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여하튼 정부는 그 한계생산비를 1천7백37원으로 발표했다. 더구나 가격폭락의 원인이 과잉생산에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책임은 고추 생산 농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도 그들은 크게 분개했다. “3천 평 고추밭의 농약대가 1만 평 과수원의 농약값과 맞먹을 만큼”고추는 연작을 싫어하지만, “대안이 없으니까” 10년째 심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고추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이 담배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아, 그놈의 양담배 수입 때문에” 오히려 고추의 경작면적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은 고추 먹고 맴맴. 정부는 그렇게 증산된 고추가 기껏해야 2천6백t으로 전체 생산량의 1.3%에 불과하다고 애써 변명하지만 농민들은 씨익 웃고 말았다. 아마 턱도 없는 소리란 뜻이겠지만,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벽은 애초에 누가 쌓았는가?
“그렇다면 다른 대체작물을 심으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나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물어보았다. “벼농사야 지을수록 적자만 쌓여 가니, 설사 그 열배 이상 품이 들더라도 내 몸뚱이 부서지는 생각 안 하고 고추를 심는 거지요”라면서 '논에다 고추 심는' 사연을 한숨 섞어 설명했다. 국내의 참깨값이 비싸다고 마구 수입하니까 결국 그 생산비는 더욱더 오르게 되고, 소나 닭에게 보릿겨 대신에 수입 옥수수를 먹이는 정책을 고치지 않는 한 보리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다는 더할 나위 없이 실감 나는 말로써 비교우위 농정의 허를 찔렀다. 그래, 그 깨달음이야말로 어느 경제학 교과서도 가르치지 않는 훌륭한 경제이론인 것이다.
올해 생산된 20만2천t의 고추 가운데 적정수요를 제외한 3만7천t이 문제의 초과분인데, 정부는 8백80억 원을 들여 그중에 2만5천t을 수매했다. 그러므로 정부가 4백억원만 더 풀면 그 열절한 땀과 정성의 결정에 이제는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고 싶어진다는 1백27만 고추생산 농가의 원통한 사정을 해결해 줄 수 있다. 부실기업을 정리하면서 어느 한 기업에 대준 이른바 종잣돈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액수 때문에 그 '분노의 고추'가 마침내 전체 농가의 3분의 2를 울리고, 아니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북새통에 굴지의 식품회사들이 1백11만 달러어치의 반제품 고추장 1천4백여t을 수입해 왔다. 아아, 이게 바로, 이 배신이 바로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를 고창하던 나라의 한 실상이었다.
이 판에 고추장 수입이라니
맥주 마시고 '하야'(하이어드(임대) 택시의 왜식 표현이리라) 타는 일부 농민들의 자포자기한 '탈선'을 농촌의 발전 어쩌구 하며 써댄 기사를 볼 때마다 울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증권회사의 창구에서 “그거 받아다 장사할라 카는데 도매는 얼마고 소매는 얼마지예? 그리고 한 장 팔면 이문은 얼마나 남습니꺼”하고 수줍게 물었다는 호미 든 어느 적삼 차림의 아낙의 일화도 사실상 도시가 선동한 죄악이다. 그래서 한 농민지도자는 “우리는 농가 부채의 탕감을 원치 않습니다. 마치 노름판에서 다 털리고 빚 갚아 달라는 꼬라지 아닙니까”라고 잘라 말하면서, 다만 정직한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가 베풀어지는 농정만이 지금 농촌을 좀먹는 패배의식과 허무주의를 몰아낼 수 있다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렇다. 그 열렬한 사랑과 그 강인한 투지가 안동의 '흙과 삶'을 지키는 한, 우리는 당분간 안동의 내일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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