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5 15:53
수정 : 2018.05.15 19:18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12월 13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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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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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행정부의 25개 부처 가운데 11개가 경제 관계 부서인데, 지난 6일의 개각으로 그중 10개 경제부처의 장관이 경질되었다. 이번의 대폭적인 개편으로 내각의 인적 구성이 새로와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 정책 수립 및 집행의 기조에서 어떤 참신한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는 평가들이 뒤따르고 있다. 경제행위에 무슨 획기적인 전환이 있을 수 없고 또 그러한 방식이 반드시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반박이 나올 법도 하지만, 사실은 그동안 정치판이 하도 '소란'해서 그 통에 슬그머니 넘어가 버렸을 뿐이지 곰곰이 따지자면 혼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새 경제내각의 상징적인 의미는 아무래도 학자 출신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의 등장으로 꼽아야 할 것 같다. 대학에 재직하면서 그분은 케인즈경제학을 강의했고, 그의 연구 업적 역시 이 분야에 대한 것이 많다. 존 케인즈는 사회주의를 생리적으로 증오했으며 동시에 자유방임주의에 대해서도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을 보인 영국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의 도전과 자유방임의 실패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지출을 바탕으로 하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후일의 철없는 사람들이 그러한 '화장'을 '혼합경제'니 '수정자본주의'니 하며 크게 착각한 적이 있다. 부총리 이외의 몇몇 교수 출신의 각료들에 대해서도 일부의 언론들은 '비판적 시각'의 경제학자라는 그 포폄의 구분이 힘든 어휘들을 동원하여 보도했지만, 여하튼 그 '비판적'이라는 단정에 비판적인 의견들이 적지 않은 것도 또한 사실이다.
권부의 핵심인 대통령의 경제담당 수석비서관에는 '안정'에 대한 신념이 불도저 같다는 경제관료가 임명되었고, 그리고 민정당의 정책위 의장에는 과거의 '성장' 제일주의 시대에 크게 목청을 높였던 인물이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잡다한' 소신들이 서로 뒤섞여 비빔밥의 오묘한 조화를 이룰는지, 아니면 된장찌개에 냉면 말아놓은 맛을 낼는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다만 부임 뒤 사흘 만에 벌써 경제수석 쪽이 기율(?)을 잡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판국이라면, 청와대의 '네오클래시컬'과 내각의 '케인지언' 사이의 긴장관계는―아니 실세다툼은―당분간 글쎄, 글쎄다.
다음으로 6명의 전직 교수와 4명의 경제학박사가 포진한 현재의 경제내각이 스스로 앞세울 그 쟁쟁한 이론만큼 효율적인 정책 수행이 가능하겠느냐는 전망에 대해서는 한 가닥의 우려가 없지 않다. 현실은 이론과 다르며, 더구나 경제는 경제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체험 이외에 다른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부합하는 물가상승률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난해한 방정식보다 시장바구니의 탄식이 더 요긴할 수 있으며, 정확한 경기예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컴퓨터보다 중소기업인의 절규가 더 절실할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좀 엉뚱한 일이기는 하나 '서울상대' 학맥의 부상이란 세간의 인식도 지금의 경제각료들에게 붙여진 꼬리표의 하나이다. 그 본래의 뜻이 엄중한 경고에 있든지 혹은 다소의 선망에 있든지 간에, 여하튼 그러한 '거북한' 규정에 앞서 실제로 그분들이 서울상대에서 무엇을 배웠고 또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냉정하게 질문하고, 나아가서 그 지식들이 과연 '오늘의 상황'을 풀어나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를 분명하게 판정하는 일이 더욱더 중요하다.
지금의 한국경제에는 그 다양한 진단만큼이나 다양한 처방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 특별한 유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불공정분배가 초래하는 사회 와해의 위험이다.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이 최저생계비의 49.5%에 불과하다는 도시노동자의 절박한 형편이나, 86년의 농약 관련 사망자 1천3백91명 가운데 8백85명이 농약 자살자라는 참혹한 농촌 사정은 그대로 침몰의 위기를 알리는 조난신호가 된다. 입이 걸기로 소문난 버나드 쇼는 언제인가 “베드로에게 빼앗아 바울로에게 주는 정부는 바울로의 지지 위에 지탱한다”라는 조금 무엄하기는 하지만 아주 솔직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실의 경제에서 '베드로의 것'과 '바울로의 것'을 두부모 베듯이 가를 수가 없다면, 누구를 베드로로 삼고 누구를 바울로로 정하느냐는 문제는 당분간 경제정책 담당자들에게 위임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의 판단이야말로 난국을 헤쳐가는 경제각료들의 의지와 역량을 드러내 보이는 첫 계기가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더운 가슴'을 잃고 '찬 머리'만 고집하다가 자초하는 파국은 온전히 그들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점만은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로는 무분별한 대외개방이 몰고 오는 역기능을 들 수 있다. 바른대로 말해서 역대의 경제장관들이 그 유창한 영어 실력만큼 솜씨 있게 미국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또 그 매끈한 처세만큼 보기 좋게 우리의 국익을 지키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당면의 선결 과제는 패면 맞을 수밖에 없다는 이제까지의 불쌍한 전례 대신에, 이번에는 패면 '왜 때려' 하고 대든다는 새로운 각오를 분명히 상대방에게 전하는 데 있다. “모든 부조리는 그것을 변호하는 투사(챔피언)를 가지고 있다”는 경고는 다소 익살스러운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지적이지만, 이런 '악역'만 연기하다가 하릴없이 퇴장하는 불행은 다시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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