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5 16:01
수정 : 2018.05.15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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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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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8년 12월 21일 한겨레신문 2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무엄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크리스마스는 어차피 '남의 생일'이다. 그러니 적당히 먹고 마시는 것은 생일의 주인을 축하한다는 뜻이 되지만, 퍼담고 들이붓는 정도가 되면 이만저만의 추태가 아닐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 '8조국'으로의 이행을 요란하게 선전해대고 있는 정부 당국과 보도기관의 철딱서니 없는 행태에 접하면서, 이거 '남의 일'에 우리가 괜히 기고만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입안이 씁쓸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맹주로 한 자본주의 전승 국가들은 세계 경제의 부흥과 국제교역의 재건을 위해 첫째 전후의 복구 재원 및 개발자금의 공동 조달과 제공, 둘째 외환의 자유로운 수급과 환율의 안정, 셋째 자유교역체제의 수립을 향후 경제 질서의 기본구도로 설정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국제통화기금 및 국제무역기구(ITO)가 창설되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기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제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유산되고, 무역과 관세에 대한 일반협정(GATT)이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실로 이 세 기구―엄격히 따지자면 GATT는 기구가 아닌 국제협약일 뿐이다―는 각국의 경제발전과 교역증대에 적지 않게 기여했지만, 반면에 미국의 달러를 배경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본주의체제의 재편과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예컨대 IBRD는 막대한 차관제공을 미끼로 유고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 낚시를 던졌고 또한 인도와 같은 비동맹세력을 유혹하는 일에 주력함으로써 적(?)을 교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물론 한국도 그 수혜국 '10인방'에 포함된다. 그리고 IMF는 외환 관리와 환율 조정을 무기로 무던히 제3세계 국가들을 농락했으며, GATT 또한 관세 철폐와 무역장벽의 제거를 핑계로 내세워 개발도상국에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문제의 IMF 규약 제8조는 5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2개항의 선언조항과 1개의 실효조항을 제하면, 경상거래에 따르는 외환 사용의 규제 철폐와 차별환율의 적용 금지라는 2개의 조항만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이상의 조건들을 수락할 용기나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외환 규제가 잠정적으로 용인되는 제14조 국가로 머물러야 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지만 요즘 같으면―특히 재무부의 형편으로는―달러를 잘 써주는 사람을 '애국 솔선자'로 표창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을 것이고, 또한 달러를 예뻐하고 엔을 미워하거나 혹은 마르크를 우대하고 프랑을 천대하는 따위의 '쩨쩨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두 조항의 준수는 그야말로 헤엄치다가 쉬하는 짓만큼이나 수월한 노릇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1백51개 IMF 회원국 가운데 14조국이 85개 그리고 8조국이 66개라는 실정을 감안할 때, 올림픽에서 4위에 입상한 '실력'을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지금까지 참아도 크게 참았고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주장이 나올 만도 하다. 아암, 그렇고말고.
어려서 배운 고조선의 '금법' 8조는 살인은 사형에 처하고 상해는 곡물로 배상하고 절도는 노예로 삼는다는, 이를테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규범으로서 유익했었지만, IMF의 8조는 국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기분' 이외에 실제의 이득이 없다. 이득이라니? 까딱 잘못하다가는 내 것 주어가며 남만 좋은 일 시키게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들어갈 때는 통고서 한 장으로 충분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되돌아 나오려면 IMF 수혜의 취소라든가 자격 박탈과 같은 빼도 박도 못 할 곤경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외환의 '내부적' 통제라는 안전판을 스스로 포기하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불가피한 외환 사정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수입 규제가 허용되는 GATT 18조국에 속해 있다. 그런데 그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납득 여부는 IMF의 판정에 따르게 되어 있으므로, 이제 해일처럼 밀어닥칠 농산물과 공산품의 시장개방 공세 앞에 스스로 내밀 '오리발'이 없다. IMF 8조국이란 사실이 무엇보다 확실하게 이 국제청문회의 '증인'이 되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이런 경우에 별로 위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곧 관세 이외에 어떠한 무역 규제도 용인되지 않는 GATT '11조국'으로 다시 한번 지위 격상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살인자들의 대회'라는 항의와 규탄이 대회장 문 앞에서 빗발치는 가운데 개최된 지난 9월 베를린의 IMF-IBRD 제43회 연차총회에서, 한국의 재무부 장관은 IMF규약 8조의 수락에 대한 용의를 표명하면서 수입제한품목은 5% 이내로 그리고 평균관세율은 7% 아래로 대폭 내리겠다고 호기롭게 약속했다. 그 덕분인지 한국은 내년도 워싱턴 총회의 의장국가로 피선되어 또 한 번 유감없이 국위를 사해에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쏟아진 무역자유화, 금융자유화, 시장자유화 등등의 '자유화 시리즈'는 마치 무릎에 망건 쓰고 따라가는 장날 같았다. 도대체 이 모두가 누구를 위해 메어주는 '총대'인가?
1986년 마침내 한국경제가 자신의 만성적 질환의 하나이던 그 지긋지긋한 국제수지 적자의 늪에서 헤어난 이래, 그 3년째인 올해는 1백40억 달러 가량의 흑자를 전망하게 되었다. 이 기쁜 날 현지금융을 포함한 4백억 달러의 외채는 더 이상 들먹이지 말자. 이 즐거운 날 고추포대의 애환과 구사대의 횡포로 시달리는 절박한 인생들도 그까짓 거 모른 체하자. 여하튼 '신나는' 일들은 최근에 들어서만도 IBRD 등에 5억 달러, IMF 등에 6억 달러, 헝가리에 1억 달러를 포함해 출자 증자 출연 차관 원조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디 그뿐인가? 소련은 3억 달러의 차관 공여를 요청하고, 미국은 또 전략방위계획(SDI)에 1억 달러 가량의 참여를 권유하고 있다. 이제 국민 누구나 조건없이 5천 달러를 소유하거나 송금할 수 있고, 또 국민 누구도 1만 달러짜리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노래의 행복한 가사대로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당양(當陽) 벌판에서 2개의 대장기를 베어버리고 50여 장수를 찔러 쓰러뜨렸던 조자룡의 무기는 적에게서 빼앗은 헌 창 세 자루였다. 우리가 지닌 '헌 창'은 도대체 몇 개나 되기에 이렇게 흔전만전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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