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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5 16:27 수정 : 2018.05.15 19:16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9년 2월 3일 한겨레신문 5면 '전망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정운영 논설위원·경제평론가
마크 트웨인은 어디에서인가 “하느님은 미켈란젤로의 디자인(구도)에 따라 이탈리아를 창조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러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냈을까? 때때로 역 대합실에 폭탄을 장치하거나 고위 정객을 납치하는 겁나는 일들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들은 수다스런 말씨와 부산한 몸짓으로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번은 이웃 나라들을 크게 웃긴 적이 있는데, 그 사연인즉 월요일 오전을 휴무로 하자는 주장 때문이었다. 일요일을 신나게 놀았으니 월요일 아침이 고단할 것은 정한 이치이며, 그러니 휴식을 취해야 마땅하다고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아주 명쾌했다. 물론 월요일 하루를 다 쉬면 더욱더 좋겠지만, 그러다가는 화요일 오전을 다시 휴무해야 할 위험(?)이 있으니 조금만 늦게 월요일 오후부터 일을 시작하자는 양보의 미덕(!)도 아주 기특했다.

고단한 월요일 쉬어야 마땅

사실 오전 11시 30분이면 점심과 시에스타(낮잠)를 준비하는 그들의 풍속으로 볼 때 그러한 요구는 좀 염치없는 주문이라는 밉살맞은 생각도 들지만, “방금 휴가를 끝낸 사람보다 더 간절하게 휴가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서양의 격언을 상기한다면 무턱대고 타박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부활절이나 성령강림축일 다음의 월요일을 휴일로 정하고 있는 서구 여러 나라의 관습도 따지고 보면 하느님을 앞세워 하루 더 쉬겠다는 심산에서 시작되었을 터인데, 하기야 하느님께서도 사람들의 그런 '잔재주'에 이제 신물이 난 참이라 이번 일도 못 본 척하고 그냥 넘겨주신 듯하다. 공휴일이 토요일이나 일요일과 중복되면 다음 날을 휴무로 한다든가, 한 걸음 더 나가서 공휴일이 목요일에 닿으면 금요일을, 화요일과 겹치면 월요일을 이른바 '브리지'(다리) 혹은 '샌드위치'의 날로 만들어 연휴의 인심을 베푸는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휴일제도의 꽃은 주 '5일 근무'이다. 흔히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 토요일의 근무는 '적당히 때우는' 수가 적지 않은데, 실제로 한 해 52개의 '반나절'을 26개의 '한나절'로 환산하고 또 현재의 공휴일을 적당히 조정하면 큰 무리 없이 주 5일 근무제도의 도입이 가능할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연료비, 광열비, 관리비 따위의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으며, 가계 또한 교통비나 품위 유지비(?) 등의 지출을 크게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를 국민경제 전체의 수준에서 합산하면 토요일 근무가 가져오는 이득보다 손실이 오히려 더 클는지도 모른다. 1973년부터 국내 최초로 5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는 삼화약품의 경우 근무 시간 단축에 의한 생산 능률의 향상으로 생산량은 그 이전에 비해 32% 그리고 매출액은 15%가 늘어났으며, 반대로 작업손실률은 7%나 줄었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일본의 경우도 지난 2월1일부터 금융기관이 주 5일 근무를 시작했으며 공무원들은 격주 5일의 근무를 개시했다.

국경일이나 명절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다만 휴식의 기회로 굳어져 가는 추세는 참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새해의 연휴 사흘을 휴식으로 지냈다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72.2% 그리고 여행으로 보냈다는 사람이 4.1%로 나타났는데, 그것도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휴식'이 아닌 그저 '잠자는 휴식'으로 만족해야 했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의 노동을 그토록 고달프게 만들고 우리의 생활을 그만큼 각박하게 만든 기업과 사회가 나누어져야 한다. 공장에서 두드리는 망치나 안방에서 내리치는 화투장에는 꼭 같이 사람의 노동력이 소모되는데, 어째서 한 쪽은 수고와 원망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 쪽에는 환희와 열락이 용솟음치는가? 노동이 밥벌이의 유일한 수단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국가의 경사나 조상의 은혜를 생각하기에 앞서 피폐해진 '노동력의 충전'에 열중했다는 사실을 놓고 불충이니 불효니 하는 조항을 들먹여가며 시비하려는 희떠운 생각은 일찌감치 버려야 그 환희와 열락이 결국은 다음의 수고와 원망을 위한 바탕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휘파람 부는 데도 벌금이

인류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였고, 그것은 또한 노동시간을 연장하려는 계급과 그것을 단축하려는 계급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였다. 1845년 24세의 청년 엥겔스가 비분강개하여 저술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는 지금도 사람들의 울화를 치밀어 오르게 하고 한숨을 토하게 만드는 책인데, 현재의 자본주의 문명이 그가 열거했던 그토록 참담한 수탈의 산물이었다면 차라리 오늘의 이 안락과 쾌적은 전부 반납해야 마땅하다는, 아니 그래야 사람의 축에 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의 전성기에는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하루에 16시간을 공장에서 혹사당했으며 실제로 1871년의 한 보고서는 세 살짜리가 성냥공장에 '취업'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1831년이 지나야 열여덟 살 이하의 노동자에게 12시간 이상의 노동이 금지되며, 실로 1847년에야 10시간 노동제가 비록 '법적으로나마' 실시된다. 더구나 각종의 벌칙을 만들어 노동시간을 갈취했는데, 예컨대 10분 지각에 3펜스, 기계로부터의 이탈에 3펜스, 이웃 사람과의 대화나 휘파람에 6펜스의 벌금을 물렸다. 1실링 안팎의 당시의 하루 품삯에 견주어 그것은 지나치게 과도한 형벌이었으며, 특히 대화와 휘파람은 불온한 음모(?)를 전파하는 수단과 신호로 이용되는 위험 때문에 지각보다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850년 직물공장 여성 노동자의 주당 근무를 60시간으로 제한하면서 토요일에는 오후 2시에 작업을 중단하는 '선심'을 베풀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토요일 오전 근무의 발단이 되었다. 모름지기 모든 남성 노동자들은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하여 여성의 그 선구적인 공적에 항상 감사의 표시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너무 부끄러운 세계 제일들

구정을 그 어색한 '민속의 날'에서 '설날'로 복권시키고 거기에 사흘의 연휴로 결정한 것은 참말로 썩 잘한 일이다. 그저 '어린 백성'들은 이런 때에나 나라의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1919년에 주당 48시간의 노동을, 그리고 1935년에 40시간의 원칙을 결정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56시간의 노동을 막무가내로 강행하면서 추호도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처지를 이제 부끄러워 ―자랑이 아니고―해야 한다. 연간 2천2백48시간을 일한다는 서울의 노동자는 세계 최단의 근무시간을 갖는 브뤼셀의 노동자보다 무려 5백79시간만큼 더 '부지런하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것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40대 사망률 세계 1위, 결핵 사망률 세계 1위, 위암 사망률 세계 2위, 간암 사망률 세계 1위,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2위의 결과를 초래하도록 유인했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부지런해야만 하는가?

엥겔스는 1840년 리버풀 막노동자의 평균수명이 15세―나는 아직도 이 숫자가 출판과정의 오식이기를 바란다―였고, 또한 직물공장에서는 21세면 은퇴(!)를 강요당하고, 40세가 되면 육체적으로 이미 폐물이 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제1차 산업혁명>이란 명저를 남긴 영국의 필리스 딘은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에딘버러 리뷰>의 1851년의 한 기사가 증언하는 “…우리는 너무 일찍, 너무 심하게, 너무 오랫동안 일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너무 빨리 살고 있다”라는 대목을 상징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너무 빨리 사는 위험을 막는 방법은 설과 추석의 연휴 결정 이외에도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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