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08 18:22
수정 : 2018.05.15 14:49
조은
어느 날 선임 근무자들이 남겨놓은 작업일지를 훑어보다가 1980년 5월18일자 일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날 아무 특이사항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그 작업일지의 여백이 수시로 그를 흔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엔지니어 생활을 정리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하찮지 않은 우리 일상의 하찮은 여백에 성찰의 눈길을 쏟은 사람과 올해도 스치고 싶다.
지난해에 만났는데 올해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만났다고 할 수는 없고 스친 사람들이다. 택시에서 스쳤거나 북콘서트 뒤풀이에서 스쳤거나 책에서 스친 사람들이다. 올해도 스치고 싶다.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스치고 싶다. 스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서지현 검사 성희롱 증언 사건을 보면서도 스치고 싶은 사람들에게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서울대 사회학과 신년 하례식에서 동국대 사회학과 제자 성폭력 사건의 ㄱ교수가 동기인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장 ㅎ교수와 함께 나타나 의기양양 후학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정년 후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임을 소개했다는 전언에 스치고 싶지 않은 16년 전 사건을 소환할 수밖에 없다. ㅎ교수는 동대 학생회에 그런 일로 교수가 해직되어야 한다면 대학 강단에 남을 교수가 별로 없다는 서한을 공개적으로 보냈었다. 1개월 정직 징계 후 복직한 ㄱ교수는 피해 제자를 무고로, 피해자 입장에 선 학과장 여교수를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로 고소했다. 성폭력 가해자가 명예훼손 피해자로 코스프레하는 이른바 역고소 사건의 중심에 섰던 사건이다. 다행히 검찰에서 여교수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한국사회학회에 한동안 발길을 끊어야 했던 사람은 ㄱ교수가 아니라 그 여교수였다. 그 여교수가 필자다. 강자들의 파렴치한 카르텔에 대해서는 여기서 멈춘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작가가 요즘 한국 사회 행태를 보면 ‘부끄러움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라는 한숨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평상심으로 돌아가 어떤 청량감, 어떤 깨달음, 어떤 진정성을 선물한 무명의 사람들과 무명의 시간을 불러온다.
지난해 추석 전날 인천공항에 내려 택시를 탔다. 그 택시기사에게 인사차 추석날 뭐 하느냐고 물었더니 가족끼리 영화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명절마다 자기 가족의 연례행사라면서. 달리 갈 데도 없고 가족이라고는 아내와 딸밖에 없어 명절이면 셋이서 극장에 가는 게 큰 낙이라고 했다. 속으로 부모님이 안 계시나 보다 생각을 했지만 거기서 이야기를 뚝 끊을 수 없어 “형제도 안 계시나요?”라고 물었더니 “형제가 수없이 많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뭘 더 물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사실은 제가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멈칫거리고 있는데 아내도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동생이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쿨하게 했다. 당황한 쪽은 나였다.
빠르게 사무적인 이야기로 옮겨 몇 살에 얼마큼의 자립금을 받아 고아원에서 나왔는지 물었다. 열여덟에 나가야 하는데 그 전에 고아원에 목수 일 나오던 아저씨의 눈에 띄어 그 아저씨를 따라 목수 일을 배웠다고 했다.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아버지처럼 따랐던 목수 아저씨가 일찍 세상을 떴고 목수 일을 하다가 손가락 상해를 입어 운전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을 보탤까 뜸들이고 있는데 아저씨가 딸 이야기로 넘어가 주었다. 딸내미가 외로울까 봐 입양을 했는데(입양까지! 하면서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학생이 뭐가 그리 바쁜지 밥도 안 챙겨주고 놀아주지도 않아 자기 일이 늘었다는 것이다. 집사람도 일 나가기 때문에 자기라도 빨리 들어가야겠다고 서둘렀다. 들어보니 유기견 입양이었다. 평범하다고 생각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의 허세 없는 말과 스치고 싶다.
어떤 통념의 전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마음에 담고 있을 때 <안티 젠트리피케이션> 북콘서트에 가게 되었다. 한 해 마지막 달력을 한장쯤 남겨둔 때다. 열한명의 공저자는 모두 주거지나 작업장에서 밀려나는 경험을 했거나 그 경험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작업과 실천을 해온 사람들이다. 책의 뒷갈피에 쓰인 “젠트리피케이션, 그 일상의 재난에 맞서는 법”이라는 카피가 눈길을 잡았다. 무지막지한 백골단에 의한 철거 재개발에서부터 ‘신사적’이고 합법적인 자본에 의한 쫓겨남까지 급속한 도시의 미화 과정이 배태한 재난의 피해 경험과 방식은 다양하다.
북콘서트 청중은 공저자 수를 겨우 넘기는 한산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뒤풀이에 따라갔다. 북콘서트가 열린 대학의 소강당 입구에 의자 몇개를 붙여놓고 둘러앉았다. 대표 편저자가 이튿날 런던으로 돌아가는 짐을 싸야 하는 일정이어서 뒤풀이할 곳을 따로 찾는 데 시간을 쓸 수 없었다. 그는 현재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도시지리학과 부교수다. 그와 마주앉게 되어 몇가지 질문을 했다. 학부 전공은 무엇인지, 어디서 공부했는지 그런 스쳐가는 질문이었다. 명함을 받았지만 무명으로 쓴다.(공적인 대담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고 그의 무명 시절을 말하고 있어서다.)
그는 공대를 졸업하고 고리 원전 1, 2호기의 현장 엔지니어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선임 근무자들이 남겨놓은 작업일지를 훑어보다가 1980년 5월18일자 일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날 아무 특이사항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그 작업일지의 여백이 수시로 그를 흔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며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엔지니어 생활을 정리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어떻게 안티 젠트리피케이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도시화의 광풍 속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재난에 주목하고 서울에 잠깐 머물면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활동가들과 함께 <안티 젠트리피케이션―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을 묶은 그의 글에서 답을 찾아야 할 듯싶다. 하찮지 않은 우리 일상의 하찮은 여백에 성찰의 눈길을 쏟은 사람과 올해도 스치고 싶다.
북콘서트 뒤풀이에서 돌아와 광주 5·18 관련 책들을 찾아 읽었다. 1980년 5월18일자 우리의 언론 보도를 찾아 읽을 염은 내지 않았다. 그날의 보도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며칠 동안 5·18을 기록하거나 분석한 책들을 뒤적였는데 어떤 책에 오래 머물렀다.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이 기획하고 이정우가 편집한 <광주, 여성: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다. 5·18 관련 다른 책들이 주로 ‘남성’, ‘당사자’ 그리고 치열했던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간의 시간’에 초점을 둔 데 비해 ‘여성’, ‘이웃’ 그리고 ‘그 열흘 이전과 이후의 시간까지 담고 있다’는 평을 담은 책이다. 그 열흘 동안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여성들이 구술한 열아홉편의 생애사가 들어 있다. 거기서 이렇게 시작하는 어느 구술자의 생애사 서두와 마주쳤다. 길지만 생략 없이 인용한다.
“화순군 동복면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전업주부셨고, 아버지는 동복면사무소 부면장을 지내셨어요. 그러다 6·25가 나면서 인민군에게 잡혀가셨죠. 나중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화순 저수지에서 애국지사 여럿을 죽였는데 그때 희생당하셨어요. 수복 후에 우리가 보훈 가족 신청을 하자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동족상잔이다. 앞으로 어느 날엔가 통일이 되면 동족상잔으로 총 맞아 죽은 선조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 않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보훈을 굳이 마다하셨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와 올해도 스치고 싶다.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하는 딸들과 스치고 싶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소식을 접했다.
역사 앞에서 무엇이 자랑할 일인지,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더 많이 스치고 싶다. 평창올림픽 개막을 목전에 두고 무명의 사람들이 바라는 무언의 바람이 발화하기를 소망한다. 평화를 여는 그리고 평화를 잇는 평창올림픽이 되기를 열망한다.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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