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31 17:57
수정 : 2019.11.01 10:09
당파와 진영 논리로 역사를 난독하는 ‘부끄러움 모르는 부끄러운 지식인들’의 행진이 어디까지일지 막막하다. 그래도 일상의 어딘가에서 턱을 괴거나 머리를 숙이며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헤이는 보통사람들의 연대를 상상한다.
조은 사회학자·동국대 명예교수
얼마 전 1박2일로 일본 삿포로에 다녀왔다. 개인 사정으로나 사회 분위기로나 일본행 티켓을 끊을 상황은 아니었는데 단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에 꽂혀 가게 됐다.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을 처음 일본 언론에 소개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자신의 기사를 “날조”라고 공격한 우익 인사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재판을 그렇게 참관했다.
그 내용이 날조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 내 우익 및 혐한 세력과 싸워 이기는 것도 포기할 수 없어 벌이고 있는 법정 투쟁이다. 엄혹했던 언론 탄압을 경험했던 해직 기자 출신들이 동병상련으로 꾸린 한국의 ‘우생모’(우에무라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삿포로에 함께 가자는 제의를 했을 때는 선뜻 답을 못했는데, 우에무라 기자가 지난 25년간 일본 사회 우익과 혐한 세력에 시달린 경험을 쓴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한국어판을 읽고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윤동주의 ‘서시’가 인생의 지침 중 하나라고 밝힌 서문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시 전문이 실려 있다.
지난 칼럼에서도 지식인의 담론 생산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물으면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반일 종족주의> 대표저자 이름을 짚고 말았는데, 이번 칼럼 쓰기도 비슷한 심사다. 우생모에서 삿포로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 날은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가 강의실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고 다만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조선의 매춘녀가 있었다는 발언으로 시끄러운 때였다. 무지하고 몰역사적인 사회학자와 동일 업종 종사자라는 부채도 삿포로행에 작용했다. 더 이상 방 밖 거동은 못하시지만 기억은 또렷한 노모께 삿포로에 잠깐 다녀와야 하는 이유를 짧게 설명드렸는데 “무슨 헛소리들을…” 하시며 한숨을 내쉬고 ‘처녀공출’로 ‘정신대’ 끌려갈까봐 혼인을 서둘러야 했던 당신과 당신 친구들 신세를, 옛날 말까지 불러와 새삼스럽게 푸념하셨다. 어머니는 고 김학순 할머니와 동년배 아흔다섯이다.
평화헌법을 내치고 전쟁국가로 향하는 일본 사회의 퇴행적 행보에 막막하기도 했지만 삿포로행은 위무의 시간이었다. 아베 정권이 한국 유신 때처럼 언론을 장악하고 혐한 세력이 공공연하게 활개 치는 폭력적 우경화 분위기에서도 삿포로 지역 변호사의 절반 정도인 200여명이 우에무라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주었고 재판정에 직접 나온 변호사도 20여명이 되었다.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일본 내 지지 모임인 ‘우시모’(우에무라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 회원들이 뿜어낸 정화력은 여러 시름을 내려놓게 했다.
잠깐이지만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시민연대의 가능성을 짚어보기도 했다. 우시모 회원들은 재판이 끝나고 네시간쯤 뒤 다시 모여 그날의 재판에 대한 경과 보고회를 개최했는데, 방청했던 참관인이 거의 한명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보고회 자리를 둘러보니 어떤 인생 이야기를 가지고 여기 왔을지 궁금해지는 얼굴들이 그득했다. 바로 옆줄에 팔순이 훨씬 넘어 보이는 주름이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턱을 괴고 진지하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 뒷줄에는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아주머니의 꼿꼿한 자세와 볼펜을 쥔 손이 시선을 잡았다. 일본말을 못해 묻고 싶은 이야기들을 삼켜야 했다. 다행히 우시모 사무국 비상임 사무차장직을 맡은 미도리씨와는 띄엄띄엄 한국말 소통이 되어 이야기를 모을 수 있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아사히신문>에 소개된 1991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미도리씨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알게 됐다. “자기도 그때 태어났으면 그렇게 끌려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정도로 지나친 줄 알았는데, 기억 저장고에는 충격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던가 보다. 미도리씨는 25년이 지난 뒤 우에무라가 바로 그 기사 때문에 ‘날조 기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일본 우익의 혐한 표적이 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우시모 간사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의 현업은 간호사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휴가를 내고 한국에서 온 우리를 안내하는 일부터 온갖 잡무를 도맡아 동분서주했다. 우에무라 재판 보고회 자리에는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을 현장실습 하도록 데려와 소개했다. 미도리씨는 공식적으로 한국어 교습을 받은 적도, 한국어 학원을 다닌 적도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살림도 해야 하고 간호사직이 3교대여서, 정해진 시간을 맞춰야 하는 학원에 등록할 수가 없어서” 한국 드라마로 배운 한국어 실력이라면서 웃었다.
삿포로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하필 류석춘 교수가 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면서 전태일이 노동을 착취당했다는 데 의문을 던진 기고문에 대한 기사를 봤다. 거의 똑같은 원고가 3년 전 한 극우 매체에 실렸고 그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었으니 이번 <월간 조선>에 낸 기고문은 세번 우려먹은 글이다. 피로 눌러썼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전태일 일기를 한쪽이라도 보았다면 낼 수 없는 뻔뻔한 글이다. 전태일 재단은 허접한 ‘학자의 글’에 너무나 신사적이고 학구적인 반박문을 내는 수고를 해야 했다.
당파와 진영 논리로 역사를 난독하는 ‘부끄러움 모르는 부끄러운 지식인들’의 행진이 어디까지일지 막막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밟힌 식민지 시기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포장되고 군사독재는 압축 발전으로 칭송되며 탈분단 평화통일 지지는 좌빨로 담론화되는, 부끄러움이 마비된 지식인 지형을 떠받치는 강고한 세력에 때로 풀이 죽는다. 하지만 그래도 일상의 어딘가에서 턱을 괴거나 머리를 숙이며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헤이는 보통사람들의 연대를 상상한다. 지식인들이 역사라는 거울 앞에서 부끄러움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한다.
끝으로 때가 때이니만큼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떤 대학인’ 이야기는 왜 피했느냐고 묻는다면, <한겨레> 이숙인 칼럼 ‘선녀에서 악녀가 되어버린 폐비 윤씨를 위한 변명’에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현숙하여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칭송받으며 왕비로 책봉됐다가 “패악이 너무 심해 도저히 중전 자리에 둘 수 없는 정도의 사람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이 단지 7개월”이라고 한 글귀가 그 답이다. ‘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던 진보 지식인’에서 ‘가족 사기단의 가장’(제1야당 유명 정치인이 지상파 방송에 나와 말한)으로 만들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한달 남짓인 것 같다며 필자와 함께 통탄했다. 스스로 더 진보적이거나 더 정의로움을 인증하려는 듯 ‘광기에 가까운 식자들’의 언설이 폐비 윤씨를 둘러싼 대신들의 간언과 교언에 겹쳐졌다. 우리 역사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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