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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21 18:06 수정 : 2018.05.16 10:31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수원의 한 아파트 동대표 회장

2016년 3월, 세 번에 걸친 회장 남기업 해임투표에 엄청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해임투표에 관해서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화였다. 목소리가 왠지 부담스러웠지만 당시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나야 했다. 만나보니 30년 가까이 경찰로 근무했던, 지금은 현역에서 퇴임한 입주민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대표들끼리 갈등하다 해임투표까지 가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한 번 투표해서 부결되면 그것으로 끝내야지, 투표 결과를 무효로 하고, 그것도 세 번씩이나 투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주민 총의를 선관위 몇 명이 뒤엎는 반(反)민주주의적 폭거다. 지금 저들은 해임이 될 때까지 투표할 태세다. 저렇게까지 불법을 마구 저지르는 데는 필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내가 도와주겠다.”

만나자마자 일목요연하게, 거침없이, 그것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는 나를 괴롭히는 동대표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그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법적 대응을 어떻게 할지, 어떤 말을 삼가야 할지 자세히 코치해주었다. 어떤 때는 회의에 참관하여 나를 괴롭히는 동대표들과 싸우기도 하고, 때론 법원과 경찰에 제출할 소장과 서류를 작성해주기도 했다. 나에겐 엄청난 도움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나의 사회관과 많이 달랐다.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어떤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정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진보고 그는 보수였다. 하지만 마을에서 진보·보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상식과 몰상식이 있을 뿐이다.

해임투표를 한 번 해서 부결되면 수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회장을 쫓아내고 싶다고 해서 회의에 와서 회장에게 욕하고 집단적으로 공격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아파트 돈을 알뜰하게 써야 하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잘못 지출된 아파트 관리비는 회수해야 한다는 것 역시 상식이다. 그가 시간을 내서 나를 도운 까닭은 이런 상식이 몰상식한 소수에 의해서 짓밟힌 것에 대한 의분 때문이다.

얼마 전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놀이터개선위원회’ 구성을 의결했다. 30년이 다 된 낡은 아파트이기 때문에 놀이터 곳곳에 손볼 데가 많다. 놀이터는 취학 전 아동과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주로 사용한다. 놀이터에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애들 엄마다. 그 엄마들 5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들이 직접 문제점을 찾고 해결 방안을 제안하도록 한 것이다. 며칠 전 5명의 위원들과 첫 미팅을 했다. 아이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놀이터 만드는 것과 진보·보수는 무관하다. 마을에는 이런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렇다. 마을에선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이 격돌한다. 마을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고, 자기의 유익만, 마을이야 어찌 되건 자기의 이익만 챙기려는 것이 바로 몰상식이다. 마을활동이 나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즐거움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상식적’인 사람들과의 어울림이다. 이런 이웃들과 만나 작은 단위의 변화를 일구어 가는 경험이 내겐 너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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