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개집 입주자 성소수자들이 사는 무지개하우스는 ‘풀옵션’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빌트인’ 하우스다.(사실은 이사 오기 전에 쓰던 대형 가구들을 배치할 공간이 부족해서 붙박이 가구들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 당하며 살다 보니 수납공간들이 비는 일도 생기곤 했다. 특히 침상을 겸한 수납장은 계절옷을 보관하는 용도였는데 보일러를 켜는 동절기에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옷감이 상할 우려가 있어서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침상 밑에 기어들어가 찜질방 체험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잠깐, 침상 밑이 옛 어르신들이 메주를 띄우던 아랫목 솜이불 밑과 비슷한 환경이라면? 유레카! 순식간에 장 담그기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본 기억 10%와 인터넷에서 엄선한 정보 90%면 일을 벌이기엔 충분하니까. 먼저 가까운 재래시장에서 골라온 콩을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삶아 메주를 만들었다. 맛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예쁘긴 했다. 그 예쁜 것들을 침상 밑에 넣어두니 역시나 하루 만에 효모균이 무럭무럭 자란다. 며칠 후 일부를 청국장용으로 분리해서 먹을 만큼씩 한지로 싸서 아래층 식구들, 지인들에게 선물하니 좋아들 했다. 맛도 괜찮았을 거라 믿는다. 이제 남은 메주를 장독에 넣고 소금물을 부어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올려두면 끝. 겨울을 넘기고 마침내 봄이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장 가르기를 위해 장독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랴, 결과는 대실패였다. 메주는 말라 있었고 갈라낸 간장은 장이라기보다는 메주 냄새 나는 소금물에 가까웠다. 그래도 포기는 이르다. 된장이라도 건지기 위해 메주를 으깨고 수분을 보충해서 다시 장독 뚜껑을 덮었다. 몇 달 후엔 한 번 더 실망할 가능성이 크지만 야단칠 시어머니도 없는데 뭐 어때. 계속 실수하다 보면 노하우가 생기겠지. 공동주택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먹거리가 풍성해진다는 점이다. 전국 각 지역이 고향인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콩국수 한 그릇을 먹을 때도 소금 넣는 레시피와 설탕 넣는 레시피를 다 체험해 볼 수 있고, 순대 한 조각도 새우젓, 소금, 된장 소스를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심신이 피곤해서 밥할 기운도 없는 날이면, 각 층에서 나는 음식 냄새들을 맡아본 다음 침이 도는 메뉴를 골라 숟가락만 들고 불쑥 쳐들어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입맛 당기는 일은 혼자 하기 부담스러웠던 각종 과일청 및 장아찌, 김치 담그기, 전통술 만들기 등에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거다. 고향집의 연세 드신 친척들 눈치를 보며 김치나 밑반찬을 얻어먹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2년 만에 김장 담그기는 무지개집의 가장 큰 연례행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언젠가는 전국의 우수 레시피만 엄선해서 손맛 가득한 김치를 ‘무지개집’ 라벨을 붙여 나눠줄 꿈도 꿔본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입맛 잃은 자들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지개집으로 오라. 다정한 밥 한 끼 같이 먹어보자.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