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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집 입주자 성소수자들이 사는 무지개집에는 전통 가옥으로 치자면 사랑방에 해당하는 게스트룸과 커뮤니티 공간인 문간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게스트룸은 화려하진 않지만 창문이 세개나 있고, 자작나무로 된 붙박이장과 좌식 책상이 있는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노트북을 켜고 턱을 괸 채 앉아 있으면 누구라도 ‘빨간 머리 앤’이 되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게스트룸은 손님들이 머무는 용도 외에, 급히 체류할 곳이 필요한 성소수자 친구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안전한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그동안 가정폭력이나 전환치료, 아우팅의 위협, 심지어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외국에서 탈출한 난민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머물다 갔다. 각자 사연이 다른 만큼 성격이나 생활습관도 달랐는데, 출입 시간 외에는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지만 예의 바른 선생님 스타일부터 입주자들의 사적 공간에 마구 침입하는 무법자 스타일, 밤이면 나가서 들어오지 않아 관리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올빼미 스타일, 심지어는 입주자들을 게스트하우스 종업원 정도로 여기는 공주님 스타일까지 다양했다. 떠날 때도 고맙다고 선물을 주고 가는 이, 침구 관리가 부실했다고 따끔하게 지적해주는 이, 소리 없이 사라진 이 등 다양했는데 그중 최고로 감동을 준 손님은 지금 현재 머물고 있는 ㄱ군이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알바 임금이 들어온 날엔 쌀통에 쌀도 채워주고, 가끔 장을 봐서 요리도 해주는, 너무나 기특한 청년이다. 게다가 입버릇처럼 “보증금(출자금) 모으면 반드시 무지개집에 정식으로 입주하겠어요”라며 팬심을 내비치기까지 한다. 그랬던 ㄱ군이 며칠 전 놀랍게도 계획보다 빨리 집을 비워야 할 수도 있다고 고백해왔다. 왜? 왜? 왜, 사흘 만에 애정이 식었냐고? 이유인즉 열대야를 참을 수 없다는 거다. 맞다. 무지개집은 덥다. 면적이 좁은 다세대 건물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창을 여러 개 만들어 최대한 많은 빛을 받게 한 결과 겨울엔 따뜻하지만, 여름엔 한증막을 방불케 한다. 그러니 창문이 세개나 있는 게스트룸은 오죽했겠나. 빨간 머리 앤의 사치는커녕 살만 빨갛게 익을 노릇이었으니. 심지어 입주 당일 경황이 없어 창문 여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한 탓에 지난 며칠 그는 꽉 막힌 방에서 선풍기 하나로 버티고 있었단다. 입주자들의 실수였다. 손님을 가장 더운 방에 재울 순 없으니 어쩌겠나. 당분간 밤에는 ㄱ군이 1층 문간방(공동공간)에 내려가서 자는 걸로 합의를 했다. 1층은 더위를 참을 수 없을 때 입주자들도 가끔 내려가서 자는 곳이다. 무지개집에서 가장 성능 좋은 에어컨도 거기에 있다. 딱 한가지 문제라면, 근린생활시설과 붙어 있어서 그곳을 대관해 스튜디오로 사용 중인 젊은 예술가 친구들이 야간작업을 할 때는 본의 아니게 마주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쪽에도 미안하고 저쪽에도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방 손님과 문간방 예술가의 조우라니, 조금은 낭만적이지 않은가 우겨본다. 부디 오손도손 라면도 끓여 먹고, 입주자들 뒷담화도 즐기면서, 무사히 여름을 나기 바란다. 참, 사랑방 손님의 코골이가 심하다는 건 우리만 아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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