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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08 18:14 수정 : 2018.08.08 19:24

전재우
무지개집 입주자

농경민족의 피가 흐르는 탓인지 회색빛 도시가 답답해서 그런지, 베란다나 옥상, 뒤뜰 등 아무리 작아도 비어 있는 공간만 보면 텃밭을 만들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 성소수자 공동주택인 무지개집에도 그런 사람이 몇 명 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임을 일단 실토부터 하고. 근데 게이 레즈비언들도 농사를 좋아하냐고? 설마 아직도 게이들은 뷰티에만 관심이 있고, 레즈비언들은 다 바이크족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는 없기 바란다.

무지개집에 이사를 온 첫해,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옥상이 욕심났다. 그래서 이사를 오자마자 선수를 빼앗길라, 부랴부랴 화분을 몇 개 들이고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었다. 첫 2주간은 괜찮았다. 모종들은 쌩쌩했고 하루 한번 옥상에 올라가 집에서 가까운 한강 바람을 맞으며 물 주는 기분도 쏠쏠했다. 그러나 장마가 오고, 집 안 여기저기서 보수공사에 열을 올리면서 옥상은 관심사에서 밀려났고, 폭염에 에어컨 없는 집의 더위에 지쳐 한번 더 관심사에서 밀려났다. 옥상의 화분들도 순식간에 기운을 잃었다. 그늘도 없고 바람을 막을 펜스도 없는 우리 옥상은 그야말로 뜨거운 사막과도 같은 곳. 아무렇게나 심어놓아도 잘 자란다는 상추, 고추는 새카맣게 탔고 누가 볼까 부끄러워 여름이 가기도 전에 서둘러 치워버렸다.

두번째 해에는 깨끗이 옥상을 포기하고 돌보기 쉬운 건물 주변 빈 공간을 공략하기로 했다. 게릴라 가드너가 된 심정으로 호기롭게 집 앞의 작은 화단에는 알록달록 꽃들을 심었고, 실내 계단 곳곳에는 허브 화분도 들였다. 하지만 또 실패였다. 건물 앞에 심어놓은 꽃들은 그야말로 누군가 게릴라처럼 뿌리째 캐내 가기 일쑤였고, 실내에 심은 허브는 반려 고양이들이 새싹이 나기 무섭게 따 먹었다. 이파리가 사라진 빈 화분은 자기들의 화장실로 여겨 다 파헤쳐놓기도 했다. 공동계단이 고양이 화장실로 변해가는 걸 지켜볼 순 없으니 모두 폐기하는 수밖에.

마침내 3년째, 올해다. 텃밭의 꿈은 깨끗이 접은 상태에서, 우연히 어느 재단에서 공동주택 시설 및 활동 지원 사업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다시금 떠오른 게 옥상이었다. 돌이켜보면, 무지개집을 설계하던 시절에는 우리도 옥상에 대한 야무진 꿈들을 꾸었었다. 텃밭은 물론, 원두막과 편백나무 야외욕조, 심지어 핀란드식 사우나와 양봉장까지 물망에 올랐었다. 그러나 예산 부족과 공간의 협소함, 건축법의 제약으로 다 포기해야 했고, 지금은 그냥 빨래를 말리는 곳으로 타협했던 차였다.

그런 옥상이라도, 주기적인 방수작업, 안전을 위한 펜스 설치 정도는 필요했는데 예산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옥상텃밭이라 이름 붙인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욕심을 버리니 기회는 찾아온다고 했던가, 합격 통지가 왔다. 남의 돈을 받았으니 제대로 썼다는 증빙자료는 남겨야 하고, 제대로 된 텃밭, 혹은 텃밭처럼 보이는 무언가는 만들어야 했다. 물론 무지개집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일처럼, 텃밭 만들기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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