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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05 18:29 수정 : 2018.09.05 19:24

전재우
무지개집 입주자

월드컵이나 올림픽 주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인다. 치킨집과 야식집의 매출이 늘고, 주택가에는 늦은 시간까지 불빛이 새어 나온다. 극적인 순간, 골목을 타고 똑같은 함성과 탄성이 동시에 들리기도 한다.

성소수자들이 사는 무지개집도 그렇지 않으냐고? 솔직히 스포츠 경기 때문에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연예인을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커뮤니티룸이 시끌벅적해진다. 그 프로그램이 퀴어의 입장에서 올바른지 따지는 건 잠시 보류하자. 사적인 공간에서라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성토하기보다는 개인의 은밀한 욕망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은가. 혹시 개인의 욕망이라면 어린 소녀 소년들을 관음증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이모 삼촌의 지위를 누려보자는 것? 노노, 아니올시다. 우리는 나이 외모 성별을 파괴한 채, 출연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함께 울고 웃는다.

흥분해서 이야기가 엇나갔다. 공동주택에 산다고 뭐든 같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서 말한 연예인 오디션이든 월드컵 경기든 모여서 보는 것보다 혼자 보는 걸 선호하는 이도 있고 티브이 자체를 안 보는 이도 있다. 그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타인들과 어울려 티브이를 보거나 술을 마셔줘야 할 의무는 없다. 가족이라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밥상을 마주하고 한방에서 부대끼며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한다고? 과연 그렇게 개인을 희생할 만큼 지금의 가족은 나에게 안전하고 가치 있는 울타리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기주의 혹은 체념을 신뢰나 배려로 위장한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공동체에 속하더라도 시종일관 서로 마음을 열어놓는 건 어려운 일이다. 죽고 못 살 정도로 마음이 맞는 친구였지만 같이 살면서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음을 발견하여 실망하기도 하고, 공간의 공유를 계기로 처음 만났지만 누구보다 합이 잘 맞는 단짝이 되기도 한다. 또 어울려 살다 보니 자신도 몰랐던 성격이나 생활습관, 취향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공동생활의 꿈에 부풀어 누구보다 집 짓기에 앞장섰지만, 살아보니 셰어하우스가 본인과 맞지 않음을 알게 된 이도 있고, 같이 살면 프라이버시가 없어질까 염려했지만 어울리며 사는 게 본인의 취향에 더 맞음을 알게 된 이도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누리고 사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대다수 사람들은 혈연과 지연과 직업에 의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특정 공간에 떨어지게 되고, 거기서 만난 타인들과 공간에 길들여지면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하게 된다. 꿈꿔왔던 안정된 삶이란 설령 이루어지더라도 찰나에 불과한 것.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간에서 살 수밖에 없다.

지금 가족의 보호 아래 평생 숨어 살겠다는 건 어쩌면 경솔하고 비겁한 판단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지금 같이 사는 이들과 떨어지더라도,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건 아니다. 그러니 공동주택을 꿈꾸는 이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당장 합쳐보라. 이해타산을 따지면 평생 이룰 수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혼자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고 주어진 인연도 영원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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