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18 10:52
수정 : 2018.05.18 10:59
[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2002년 3월 8일 한겨레신문 14면 ‘김훈의 거리의 칼럼’
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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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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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불우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아들이다. 술 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 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 달 운영비는 1200만 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 원이나 3천 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 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 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아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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