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8.16 20:38 수정 : 2019.04.19 10:09

[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수십 번 거울에 비춰보고 여러 번 옷매무시를 점검하던 딸이 드디어 구두를 신는다. 직장 첫 출근 날. 계단으로 내려가 1층 길로 나오려면 2분쯤 걸리리라. 딸이 한 나무에서 한 나무 사이로 총총 걸어가는 순간을 용케 잡아 사진을 찍었다. 희뿌연 즉석필름 위에 딸의 까만 머리통과 내딛는 발걸음이 서서히 나타난다. 대견하고 애틋하다. 지금 네 나이에 나는 너를 낳았는데, 너는 세상으로 첫 걸음을 떼는구나. 빈 집에 남으면 인공지능 클로버에게 말을 걸었다. <맘마미아!> 영화음악 틀어줘. 음악다방 디제이를 하던 옛 시절 넘치게 듣던 아바 노래가 흘러나왔다. ‘Slipping through my fingers’를 반복해서 들었다. “책가방을 들고 아침 일찍 집을 떠나는 딸아이. 그냥 멍하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데, 나는 낯설고도 낯익은 슬픔에 복받쳐 딸아이를 바라보네. (…) 매번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시간, 난 매 순간 그 느낌을 붙잡아보려고 해.”

이 노래를 십년 전에 본 영화 <맘마미아!>에서 뮤직비디오처럼 만났다. 엄마 도나는 딸 소피의 머리를 빗어주고 상처 난 종아리에 뽀뽀를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면서 다 자란 딸의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이 노래를 불렀는데, 정작 눈물이 지중해 물결처럼 출렁거린 건 내 눈이었다. 딸의 모든 ‘첫’ 경험을 기억하고 달라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잡아보려는 엄마 도나가 바로 나구나, 그랬는데 같은 장면에서 어렸던 딸아이도 철철 울었다, 말했다. 엄마와 딸이 <맘마미아!> 영화 주인공들처럼 완벽하게 마음을 나눴던 시간이었다.

절절 끓어 넘치는 8월 더위가 계속되던 날 십년 만에 만들어진 영화 <맘마미아! 2>를 보러 갔다. 딸은 이미 서너 번을 본 후였다. 엄마 도나의 화양연화 시절이 경쾌하게 불려나왔다. 스무 살 청춘, ‘아이 해브 어 드림’을 부르며 여행을 떠난 젊은 도나가 아빠가 누군지 궁금해 할 미래의 딸을 갖기까지의 과거를 납득하게 만드는 두 시간이었다. 이번엔 딸과 내가 눈물 흘린 지점이 달랐다. 딸은 잠깐 울고 말았다지만 난 두 시간 내처 눈물이 났다. ‘엄마 도나’가 없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그 여자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여행 갔다가 아기를 낳았으니 스물두세 살, 딸이 스물두세 살이 되었으니 많아야 오십 살 남짓. 그렇게 엄마 도나는 세상에서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할머니 루비, 엄마 도나, 딸 소피, 그리고 아마도 딸일지 모를 아기로 이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여성의 주체적이고 꿈 가득한 삶을 노래하는데, 젊은 날 만나 사랑했던 세 남자까지 모두 찾아온 다정한 그 자리에 도나만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짝을 찾고 사랑을 시작하는 성당 세례식에 도나는 혼령으로 찾아와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불러주고 지중해 햇살 속으로 사라진다.

딸들은 어떻게든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과거 어떤 삶을 살았던들 사랑하고자 노력한다. 엄마니까,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어떤 엄마들은 자신의 지난 삶을 사랑하지 못할 수 있다. 엄마는 용감했나봐.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냐고 딸은 종종 묻지만, 나는 텅 빈 섬에서 홀로 아이를 낳는 젊은 도나에게 부질없이 말을 건다.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다며 왜 혼자 그 좁은 섬으로 들어간 거야. 나는 꿈이 있다고 노래하면서 떠난 여행에서 왜 짧은 연애만 한 거야. 아빠 없는 딸을 낳고 엄마 없어 슬펐던 자기 삶을 딸에게 이어주고 그렇게 서둘러 갈 거면서.

권혁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권혁란의 관계의 맛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