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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14 06:02 수정 : 2019.04.19 10:05

[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여성들이 좋아하는 야한 소설로 소문났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영화로 보았을 때 두어 번 놀랐다. 도미넌트나 서브미시브, 결박과 훈육 같은 성적인 관계에서의 역할 설정에서 그랬고 그레이와 아나스타샤가 맺는 길고 세밀한 계약서에는 감탄할 정도로 놀랐다. 관계를 맺으면서 저토록 짯짯한 계약서를 쓰면서 시작하다니. 충격적인 섹스 방법이나 가학과 피학의 역할을 정하는 내용보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부록에 붙은 목록 중 잠자기 항목, Sleep 부분이었다. The Submissive will ensure she achieves a minimum of eight hours sleep a night when she is not with the Dominant. 서브미시브인 당신은 하루 최소 여덟 시간을 자야 할 것이다. 도미넌트인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계약자체가 다소 불평등하므로 정작 당사자인 아나스타샤는 꽤 당혹해 한 부분이었지만 나에겐 가장 마음에 드는 계약이었다. 충분히 자서 건강하라는, 그래서 잘하라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사이이든 섹스를 한 후이든 잠은 절대 홀로 자라는 쪽으로 본다면, 반드시 같이 자야 한다는 강제와 집착의 규율보다 얼마나 훌륭한가.

남녀가, 보통 부부가 한 침대에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볼라치면 낯설었다. 영화나 드라마니까 그렇겠지, 실제 다들 저렇게 잠들진 않잖은가. 한 침대는 그렇다 쳐도 이불마저 한 장 덮고 자는 장면에선 더더욱. 그 와중에 서로 다른 잠버릇 때문에 이불 하나를 갖고 성내거나 다투는 걸 보노라면 혀를 찰 수밖에. 흥부네 집처럼 가난한 게 아니라면 방법은 많잖은가. 이불을 사든가, 트윈 베드로 바꾸든가, 방을 따로 쓰든가. 아무리 한 지붕 아래, 한 이불 덮고 한솥밥을 먹는 경제와 운명공동체인 가족이라 해도, 친밀한 사이의 최고봉인 부부라 해도 ‘잠’만큼은 홀로 잘 수 있어야 독립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사람들은 아기를 낳으면 혼자 잠을 잘 수 있을 때까지 애써 키운다. 아예 신생아 때부터 혼자 재워서 혼자 잘 수 있게 훈련을 한다. 제 손으로 밥을 먹고 제 방에서 잘 수 있도록 아이도 힘써 자란다. 그렇게 절치부심 독립을 향해 최소 20년 넘게 자라온 사람들이, 마침내 성장을 마친 후에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한 방에서 한 침대에서 같이 잠자기 시작한다. 결혼과 동시에 그동안 확보한 단독자로서의 내 공간과 몸의 거리를 의아할 정도로 의심 없이 합치고 좁히는 것을 합당한 수순처럼 밟아간다.

어린이도 당연히 혼자 자는 집에서 부부는 싸워도 절대 따로 자면 안 된다, 각방 쓰면 안 된다는 말들을 아직도 금과옥조처럼 되뇌는 세상이지만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각방을 쓴다. 나도 그렇다. 가장 작은 방일지언정 싱글 침대와 책상 하나를 놓고 내 잠은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가져왔다. 두 살 터울의 아이 둘을 양팔에 끼고 반듯이 누워야만 재울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잠들기까지 첫째는 내 귓불을 만져야 했고 둘째는 내 머리칼을 손에 감아 돌려야 했다. 좌청룡 우백호 양쪽에 붙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깨는 탓에 꼼짝도 못하면서 얼마나 간절히 내 사지를 풀어 움직이고 싶었던지. 얼마나 혼자 서서히 조용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랐는지. 한손에라도 책을 들고 읽다가 떨어뜨리며 졸고 싶었는지.

그 옛날 사랑방과 안채로 나뉘어 독수공방하는 여인이 차라리 부러웠던 날들을 지나왔다. 홀밥, 홀술, 홀영. 청승기도 있으나 단출한 행위에 ‘홀잠’의 아름다운 시공간의 단어를 더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비록 잠들기 전 확보한 자유가 휴대폰으로 영화나 보다가 떨어뜨리더라도.

권혁란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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