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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2 06:02 수정 : 2019.04.19 10:04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중 한 장면. 출처 imdb

[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중 한 장면. 출처 imdb

성관계라는 글자를 본다. 뒤이어 붙은 불법촬영 동영상이란 글자를 본다. 따라붙은 ‘유포’와 ‘협박’이란 글자까지 읽고 나면 마음이 진창이 된다. 성관계 동영상 단톡방 공유 및 돌려본 멤버까지 쓰여 있는 게 최근 뉴스다. 성관계라는 글자 앞에 ‘여(자)친(구)’가 붙어 있던 저 끔찍한 문장에는 이제 약물, 기절, 강간까지 눌어붙어 휩쓸려 다닌다. 같이 한 내밀한 몸짓은 (여성의) 합의 없이 몰래 찍혀 (여성의) 동의 없이 잘게 잘려 뼛조각처럼 흩뿌려진다. 어디까지 갈 거야? 여친 몰카에서 초대남 집단강간으로, 리벤지 포르노로 여성과의 성관계를 기이하게 소비하고 모욕하던 남성들은 성상납, 성접대, 물뽕 특수강간까지 더해 여성의 몸을 던지고 주고받는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비열하고 용렬해질 수 있냐고 다큐소설 <하용가(하이, 용돈 만남 가능?)>를 읽을 때만 해도 비틀린 성의식의 못된 남자들만 하는 짓이라 애써 믿었으나. 주말 저녁 텔레비전에서 웃던 남자연예인이, 즐겨듣던 그룹의 남자가수가, 나이 든 남자정치인이, 신문의 남자발행인이, 대학교의 남학생들이, 여학교 남자교사들이, 남자직원이, 남자친구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의 거리와 의미가 무색할 만큼 숱한 남성들이 여성을 물건처럼(하물며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 대하는 걸 참담하게 목도하고 있다.

딸 키우기 무섭다고?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고? 일부 남자들만 그런 거라고 피해 가는 지금의 어른 남자들은 젊었을 때 인격적으로 여자를 대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1980년대 중반, 그 뜨거운 반정권운동의 시대, 민주화 투쟁을 같이하던 남학생들과 남자 선배들도 내남없이 음담패설을 뱉어냈다. 이디피에스(음담패설) 하나 해줄까? 삽신교라는 게 있어. 꽂을 삽(揷) 몸 신(身).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꽂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처녀를 먹을 때는 이렇게 삽신하라, 아줌마와 할 때는 이렇게, 할머니에겐 저렇게… 스무 살 언저리의, 성관계를 잘 모르던 여학생들은 낄낄거리며 주워섬기는 그 소리를 면전에서 다 들어야 했다. 사귀다 헤어지면 잘 주는 애니 걸레니 떠들고 다녔다. 축제 마당에선 취한 남자들이 성희롱과 성폭력을 예사로 벌였고 거리나 버스에서 제멋대로 여자 몸에 손을 뻗었다. 유머게시판이라는 곳에는 여자의 나이와 성을 과일로 비유하는 글들이 떠돌았고 늙수그레한 남자들은 정성스레 외워와 재담이랍시고 여자들의 면전에 퍼부어댔다. 10대는 호두야, 까기도 힘들고 먹잘 것도 없어. 30대는 수박이지, 물도 많고 손만 대면 쩍 갈라져. 그 남자들이 작금의 ‘아재’들이다. 그 남자들이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이 지금 온몸과 영혼이 물건처럼 대상화된 채 죽어가는 딸들이고 성관계를 찍어 공유하고 돌려보며 죽이는 아들들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중 한 장면. 출처 imdb
잘못 배운 성교육부터 남녀노소 공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영국드라마 <섹스 에듀케이션>을 추천한다. 문자 그대로 ‘성교육’인데 한국어 제목으론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가 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16살 고등학생들이다. 섹스포비아가 되어 자위도 못하는 남학생이, 외롭고 가난해서 충동적으로 성관계하는 여학생이, 사랑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협박하는 아이, 게이 정체성을 숨기거나 홀로 낙태를 해야 하는 청소년들이 고민하고 상담하면서 저마다 성교육을 주고받는 대견한 이야기다. 성기 사진이 만천하에 뿌려져 고통받는 여학생 에피소드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오마주한 것 같은 대목에서는 박수까지 치게 된다. 누구의 성기냐? 수군거리는 강당에서 여학생들이 한 명씩 일어나 ‘캡틴 오 마이 캡틴’ 대신 ‘잇츠 마이 버자이나’를 외치며 서로의 손을 잡는데! 정준영 성관계 동영상 찾을 시간에 검색창에 ‘섹스 에듀케이션’ 먼저 써보라. 충분히 야한데다 제대로 공부 될 테니.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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