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7 06:01
수정 : 2019.05.1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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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노말리사>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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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권혁란의 관계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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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노말리사>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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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누구인 줄 알아? 한 사람이 물었다. 착한 여자? 딸? 질문 의도에 맞을 만한 대답을 해봤다. 아니. 제일 예쁜 여자는 처음 만난 여자야. 트위터에서도 비슷한 글을 읽었다. “올 때마다 바뀌는 이곳의 알바생들을 보며 다시 떠올리는 진리: 남자에게 제일 예쁜 여자는 처음 만난 여자.” 오호라. 별 재미도 없는 농담이다 싶었는데 뉴 페이스 효과가 진리로까지 여겨지는구나.
처음 만난 여자라서 가장 예뻐 보이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여자로 느껴져서 단박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생각났다. <아노말리사>(Anomalisa). 이름마저 돌처럼 딱딱하고 뭉툭한 마이클 스톤은 권태가 중증의 병이 되어버린 중년의 남자다. 생기 없이 굳은 눈 코 입에 지겨움과 피로의 기색을 덮어쓴 마이클 스톤의 귀에는 오래 전에 헤어진 애인의 따지는 목소리도 생리통으로 아프다는 아내의 목소리도 장난감을 사오라는 아들 목소리도 똑같이 들린다. 고저장단이 없는 한 남자의 음성으로만. 택시운전사도 호텔 보이도 친척들도 입은 옷만 다를 뿐 얼굴에서 다름을 찾아내지 못한다. 병명은 정확하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꾸물꾸물 움직여서 자기 아닌 타인을 변별할 능력을 잃어버린 프레골리 증후군이다.
“어서 차라리 어두워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는 첫 문장으로 숨 막히는 초록 풍경의 지겨움을 뱉어내는 이상의 ‘권태’ 속 주인공이 미국 신시내티로 몸을 바꿔 나타난 것 같다.
자신이 가장 밋밋하게 개성이 없으면서 낯섦과 다름을 찾아 넌더리나는 일상의 시간을 바꾸고 싶은 남자의 직업은 공교롭게도 타인과의 소통과 감동고객서비스를 주장하는 유명 작가다. 신기하게도 매사 심드렁한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남자는 줄기차게 섹스 욕구를 붙들고 어떤 여자하고든 잘 기회를 노린다. 오죽하면 안 좋게 헤어진 옛 애인까지 불러내 앞뒤 따지지 않고 호텔방으로 가자며 술을 권할까. 마침내 구원처럼 아니 환청처럼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노말리(anomaly·이례적인 것)한 리사(lisa)의 출현이다. 처음 만나는 여자, 똑같지 않은 여자, 특별한 여자,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될 리사를 찾아낸 남자는 흥분으로 들떠 올라 ‘당신은 너무 특별하다’고 연거푸 외친다. 하필이면 리사는 열등감 덩어리로 뭉친 여자인데다 유명작가 마이클을 오래 연모하고 존경해왔다. 오매불망 만나고 싶었던 남자가 보자마자 뜨겁게 사랑을 고백하고 특별하다고 추어주니 리사는 황홀해서 날아갈 것만 같다.
매력이라곤 한 톨도 없는 권태로운 남자의 새 여자에 대한 집착과 자신감이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평범한 여자의 징그러운 하룻밤 정사 이야기 같은 영화의 끝은 그러나 ‘아노말리’하다. 몇 시간 만에 리사는 훌륭한 목소리를 가진 가장 예쁘고 특별한 여자에서 헌 여자, 못 견디게 지겨운 버릇을 가진 여자, 흉터를 드러낸 못생긴 여자로 급전직하 내쳐진다. 마이클은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로 가득한 지옥으로 돌아가지만 리사는 스스로 아노말리사의 다른 뜻을 찾아낸다. 천국의 여신. 원래부터 리사일 뿐이었던 리사는 두 개의 다른 언어로 ‘걸 저스트 워너 해브 펀’(Girl just wanna have fun)을 부르는데 거기에 아노말리사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처음처럼 새로워진 건 리사이지 마이클이 아니다. 소녀들은 즐기고 싶을 뿐이야. 소년은 아름다운 소녀를 데려가 세계로부터 그녀를 숨기지. 나는 태양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렇게 될 거야.
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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