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사탕수수 그늘로의 두번째 일본여행, 오키나와 남단 이시가키에서 스노클링 즐기기
외국여행 자율화 직후인 1989년 여름, 처음 국외여행을 갔던 곳이 일본이다. 도쿄·교토·나고야·오사카 쪽 기억이 난다. 오래된 성과 절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고 전자상가에서 워크맨을 만지작거렸고 맛집을 찾아다녔다. 물론 벳푸 등 온천도시에서 온천욕도 빼놓지 않았다.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하지만 일본 여행 ‘스타일’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일본 여행자들은 도시나 온천을 중심으로 여행계획을 세운다.
제주의 하루방 같은 수호신 ‘시사’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한국은 개나리 피는 3월이지만, 훗카이도는 한겨울 스키리조트가 열려 있고, 오키나와 밑 400여㎞ 떨어진 야에야마 제도에서는 스노클링이 한창이다. 야에야마의 중심에는 이시가키섬이 있다.
이시가키는 일본인들에게도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으로 손꼽히지만,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이시가키’(石垣)라는 섬 이름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느라 둘러쌓은 돌담에서 유래한다. 이시가키는 오래된 집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바닷가에 굴러다니는 크고 작은 돌들을 주워 와 대충 얹어 놓은 듯 보이지만 산호이끼의 마찰력 덕분에 웬만한 태풍에도 끄덕 없다고 한다. 얼핏 보면 제주 돌담과 비슷하다. 제주도의 하루방처럼 이시가키에서도 사자모양의 수호신인 ‘시사’를 쉽게 볼 수 있다. 집을 지켜주는 시사는 암수 한 쌍이다. 입을 벌린 것이 수컷이다.
이시가키는 일본이지만 일본스럽지 않은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주둔해 온 미군기지의 영향을 받아 고대 ‘류큐 왕국’의 모습을 잃어버린 곳이 오키나와라면, 이시가키는 거기에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문화가 합쳐져 독특한 인상을 풍긴다. 사람들의 생김새 그리고 사탕수수, 맹글로브 나무를 보면 타이나 필리핀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오키나와 본섬보다 타이베이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높은 건물도 없다. 가장 높은 건물이래야 5층 정도다. 주민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시내와 몇몇 리조트, 경작지를 제외하면 섬은 울창한 아열대 밀림이다. 부동산 개발 광풍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 한국과 비교해 본다면 이시가키 시내는 70~80년대의 작은 시골 읍내로 돌아간 느낌이다.
북쪽 스쿠지 해변에서 스노클링 장비를 차고 바다에 들어갔다. 해변에서 50여미터를 나아가도 수심이 깊지 않다.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바위 주변에 몰려 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곳이라면 배를 타고 멀리 산호초 지역에 나가 다이빙을 해야만 봤을 것이다. 열대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열대어는 되레 손가락을 쪼더니 도망간다. 바위틈에 꿈틀거리는 거무튀튀한 물체가 있다. 자세히 보니 해삼이다. 남자어른 허벅다리만 하다.
조금 더 깊은 바다를 탐험하려면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빌려야 한다. 카비라만은 일본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다. 운이 좋다면 소형 트럭을 덮을 정도로 크다는 만타가오리를 만날 수도 있다.
이시가키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40여분 서쪽으로 나가 이리오모테섬에 도착했다. 작은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나카마강을 올라갔다. 양옆에는 맹그로브나무 숲이 울창하다. 괴기스러운 모양에 소름이 돋았다. 맹그로브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강 하류에서 잘 자란다. 물속에 잠겨 있는 뿌리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다 자란 줄기를 물속에 떨어뜨린다. 줄기는 다시 뿌리가 돼 번식한다.
4만여 그루 야자수… 섬 전체가 식물원
해변 가까이에 떠 있는 유부섬은 전체가 하나의 식물원이다. 4만여 그루의 야자수와 야에야마 제도에 서식하는 식물들과 나비를 구경할 수 있다. 유부섬까지 가는 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아서 물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다녀올 수 있다. 주름살이 깊게 팬 노인이 물소 달구지의 운전수다.
“본디 농사를 짓느라 태평양전쟁 이후 대만에서 들여온 놈들이에요. 하지만 농기계가 들어와 물소들이 할 일이 없어졌죠. 이제 물소들이 당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겁니다.”
노인은 갑자기 한쪽 나무상자를 열고 ‘산센’(三線)이라는 악기를 꺼냈다. 구슬픈 가락이 어디선가 들어봤던 곡이다. 몇 해 전 한국에서도 개봉됐던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에 흘렀던 선율. 오키나와의 전통민요 가락에 가사를 붙여 일본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노래라고 노인이 말했다. 바람이 세찼다. 시퍼런 바다로 저물어가는 해를 뒤로 하고 귀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촉촉해졌다.
이시가키(오키나와)=글·사진 임호림 기자 nam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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