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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냉은 습관, 회냉은 유전”.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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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곱빼기와 ‘사리 추가’로 사람들을 놀래키며 냉면 사랑을 전염시키는 어느 마니아의 고백
특정한 음식을 좋아하는 건 유전일까, 습관일까. 어떤 음식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어느 정도의 집착이냐고? 한번 들어보고 판단해주길 바란다.
먼저 나는 냉면에 관한 한 ‘보통’을 먹어본 적이 없다. ‘곱빼기’ 또는 ‘사리 하나 추가’가 필수다. 곱빼기를 먹은 뒤에 사리 하나를 추가한 적도 여러 번 된다. 서울 마포 을밀대에는 이런 나를 위한 메뉴인지는 몰라도 ‘민짜’(같은 값에 쇠고기 고명을 빼고 사리만 정확히 두 배로 주는 메뉴임) 냉면을 팔아 나를 기쁘게 했다. 밥은 두 그릇씩 먹지 않는 내가 왜 냉면에는 무릎을 꿇는가 말이다. 나의 ‘음식 제자’라 할 만한 회사 후배 이아무개와 한 달 전쯤 벌인 ‘행각’은 지금 생각해봐도 좀 엽기적이었다.
을밀대의 ‘민짜’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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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래옥 냉면은 진한 육수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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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다. 서울 시내의 웬만한 냉면집은 대부분 순례했다. 을밀대 같은 곳은 예전에 하던 식당이 비좁아지면서 몇 번에 걸쳐 주변 건물로 확장했는데 공간이 넓어지는 역사를 그대로 꿰고 있을 정도다. 아예 식당 자리를 옮긴 몇몇 냉면집은 ‘비포’와 ‘애프터’의 맛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가 본 적도 있다. 유명한 냉면집을 두루 거치는 버스 노선이 생겼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서울시에 민원 서류를 접수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냉면은 일본 니가타에 취재 갔을 때 현지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냉면집에서 먹은 소박한 물냉면이었다. 곱빼기로 두 그릇을 시켜 먹었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쳐다보던 동포 사장님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그 근처로 가면 일부러라도 한번 찾아가 먹어보고 싶다.
어쨌든 나는 냉면과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니 시원한 육수에 정신까지 맑아지는 물냉면을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물냉면뿐만 아니라 회냉면도 즐긴다. 물냉면이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라면 회냉면에는 유전적 요소가 다분히 녹아 있다. 내 유전자 속 음식 계획표에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다. 함경도가 고향인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전자에 함흥냉면의 단백질 조합이 진하게 새겨져 있을 가능성은 무척 높다. 생명체는 유전자에 기록된 계획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이론이 있다던데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 이렇게 냉면집들을 전전하는 것은 음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 북부 지방, 즉 고성과 속초에서 냉면의 본류는 회냉면이었다. 좀처럼 끊이지 않는, 질기고 반투명한 면발에 명태가 회의 재료로 들어가는데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내 고향인 아야진이라는 작은 어촌의 일품 냉면집인 오미식당이나 속초 시내에 있는 원조함흥냉면집에 가면 회냉면을 먹을 때도 꼭 찬 육수를 물냉면처럼 부어 먹는데 서울에서는 회냉면을 그렇게 먹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회냉면을 먹을 때면 난 종업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꼭 찬 육수를 주전자로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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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은 육수를 맛보기 전에 먹어야 한다. 남포면옥 냉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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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대통합’의 아이콘이올시다
냉면은 흔히 ‘계급 없는 음식’으로 불린다. 가장 비싼 메뉴와 가장 싼 메뉴가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법이 없을뿐더러 가장 비싼 것도 만원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반제국주의 게릴라 투쟁을 벌인 제3세계 지도자들이 면 종류를 좋아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해에 세상을 떠난 체 게바라와 음식 회동을 한번 할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물냉면 한 그릇, 회냉면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글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한겨레교육서비스본부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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