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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10대 시절에 대해선 말을 않겠습니다. 20대엔 한 잔만 마시겠다는 술이 꼭 한 상자로 끝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술만 마시면 ‘지상낙원’인데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짐을 싸서 여행을 떠나느냐고 생각했습니다. 30대엔 술도 끊고 남들처럼 여행 좀 다녀보려 했더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가 발목을 잡습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30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여의도공원 나들이라도 나갈라치면 대략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아이를 쫓아다니며 옷을 겨우 입힌다 싶으면 아이는 목이 마르다며 음료수를 달라고 합니다. 아이는 당연히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다 옷을 버리게 되고 옷을 다시 갈아입힐라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저귀에 똥도 한무더기 쌉니다. ‘밖에서 싸는 것보단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엉덩이를 씻겨주고 나면 이번엔 배가 고프다며 밥을 달라고 합니다. 한 숟가락 먹고 텔레비전 보고 한 숟가락 먹고 책 읽어달라고 조르고 한 숟가락 먹고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 아이는 이제 졸린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이쯤 되면 저도 ‘아이고 잘됐다’며 같이 이불을 펴고 눕습니다. ‘먹이고 치우고 재우고’ 3박자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요리보다 요리책, 여행보다 여행책으로 사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행책으로 유럽횡단과 미국대륙 종단은 기본, 그린란드와 남태평양 피지도 다녀왔습니다. 유럽이나 일본은 도시마다 여행 에세이집이 나온 건 물론이고, 디자인·미식 등 테마별 여행책도 많이 출간돼 책으로 떠나는 여행길이 실제 여행보다 더 흥미진진하더군요. 그런 저에게 북유럽은 아직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습니다.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 등은 ‘세계를 간다’ 식의 정보책 외엔 이렇다 할 책이 없어서였습니다. 특히 노르웨이 하면 아는 거라곤 대체 왜 ‘노르웨이의 숲’이란 제목이 붙었는지 알 수 없는 하루키 소설이 전부입니다. 여하튼 노르웨이 기사를 읽고 나니 떠나고 싶습니다. 어디 노르웨이뿐이겠습니까? 뭐라도 발목을 잡혀본 사람들은 제 마음을 알겠지요. 외롭다는 거 그거 다 투정이라는 것. 하지만 뭐라도 비빌 것 없는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발목 잡혔다는 거 그거 또한 투정이라는 걸. 김아리 〈esc〉 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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