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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4.21 21:21 수정 : 2010.04.21 21:27

젊은 예술가의 작업실에 놀러가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3명의 ‘나의 작업실 이야기’

고흐에게는 노란 방이 있었고, 앤디 워홀에게는 ‘팩토리’가 있었다. 조선의 도화서도 화가들의 공동 작업소였다. 미술 작가들을 위한 창작 스튜디오가 국내외에 늘고 있다. 창작 스튜디오가 늘면서 전시회, 워크숍, 세미나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점점 다양해진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란 미술 창작 스튜디오에서 활동이 활발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업실을 제공하고 국내외 큐레이터들을 초청해 이들의 작품을 프로모션까지 해주는 등의 지원 프로그램을 뜻한다. 미술 작품을 상상하고 만들고 보여주고 서로 대화하는 일들이 이 방에서 일어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창동·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한다. 14명의 작가가 입주한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를 찾았다. 지난해 12월 입주한 작가들은 1년 동안 각 방의 주인이 된다. 캔버스가 너무 커서? 춤추듯 붓을 휘둘러야 해서? 창작 스튜디오는 입주 작가들의 방에 들어가 봐야 그 속살을 볼 수 있다.

(왼쪽부터)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전경, 흥미진진 연구소 같은 김시원 작가의 작업실, 스튜디오를 작업실이자 집으로 사용하는 최기창 작가의 작업실.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김시원 | 101호 흥미진진 연구소 혹은 제작소

김시원 작가의 101호 작업실은 계획적이다. 사각형의 하얀 방은 장난기 어린 눈을 가진 작가의 작업실치고는, 편견이지만 너무 깔끔하다. 작업실 한가운데는 짙은 갈색의 커다란 책상 차지다. 음반이 책장 하나를, 여러 분야의 책이 또 책장 하나를 채운다. 4면의 벽을 따라 공간마다 작가의 활동 종목이 바뀐다. 작업실의 첫인상은 뭔가 흥미진진한 걸 연구하는, 지루할 새 없는 연구소 또는 문방용품 주문 제작소다. “제 연구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요새는 거리에서 보고 생각했던 것을 앉아서 정리하고 있어요. 책 보고 글 쓰고요.”

아침이면 작업실로 출근하는 김 작가는 스스로 고용한 101호의 회사원이다. 밤 11~12시 무렵 퇴근한다. 음식은 주로 만들어 먹는다. 2층에 공동 주방이 있고 음식이 가득한 냉장고가 있다. 규칙적으로 스튜디오에 나와서 뭔가 하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 “일종의 회사원인 거죠.(웃음) 영감 받아서 확~ 순간에 작업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전 그런 쪽은 아니에요. 매일 한 줄 일기를 쓰고 있어요. 오픈 스튜디오 때 이 벽 한쪽 면에 한 줄 일기를 다 모을 거예요.” 일기 전시를 위해 김 작가의 101호실 한쪽 벽면은 텅 비어 있다. 4월12일의 일기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문을 열 수 없는 상태’. 진짜 작업실 문이 잠겨서 열쇠 기술자와 작가는 방에 갇혔었다.

처음부터 이런 작업실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예전에 생활했던 홍대 작업실은 거의 쓰레기장이었다.

“지하 콘크리트 바닥이었는데 전 스티로폼을 깔고 잤어요. 한 친구는 ‘왜 이렇게 살아?’라고 말하고 갔죠.”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순히 넓은 작업실이 있다는 점이 아니다.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갖게 된 게 큰 변화죠.”

김 작가는 지난 17일(토) 창동창작스튜디오에서 인천아트플랫폼까지 두 발로 직접 ‘걸어가는’ 작업을 진행했다. 걷기 프로젝트를 하루 앞둔 금요일,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음 9시부터 걷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어요. 불가능해 보이기도, 가능해 보이기도 해요. 미리 갈 길을 정해놓지는 않았어요. 창작 스튜디오 간의 교류를 주제로 하는 전시에 작업을 내야 하는데 진짜 교류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진짜 둘 사이를 걸으면서 이어보자 생각했어요. 50㎞나 되는 줄은 몰랐죠.”

◎ 권자연 | 202호 잘 정리된 서랍 속 같은 생각 창고

2층 계단을 지나 202호 권자연 작가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방금 ‘반가워, 안녕’ 인사를 나눈 필리핀 작가 주카의 작업실과는 180도 딴 세상이다. 사회 풍자적인 페인팅을 그리는 주카의 작업실이 그의 작업처럼 야생적이고 강렬했다면 권 작가의 방은 잘 정리된 서랍 속 같다. 차곡차곡 작업의 재료와 결과물을 쌓아둔 서랍이 거대한 창고처럼 모여 있다는 게 작업실의 전체적인 풍경이다. 작업실 한쪽에는 작품 설치에 필요한 못, 망치 등의 도구 상자와 작품 운송에 필요한 포장지가 돌돌 잘 말려 있다. 어떤 공간 한 평도 가로막이나 책장으로 가로막힌 데가 없다. 연두색 시트의 작은 침대까지도 오픈되어 있다.

“이쪽은 거의 창고예요. 작업실을 다 옮겨 오면서 이전 작품이 이렇게 쌓여 있어요. 짐들이 많죠.” 설치와 사진 작업, 자료 수집과 취재를 병행하는 그의 작업 도구는 간소하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듯 모를 듯 한 미술 작가들의 ‘도구 퍼레이드’와 달리 권 작가의 작업도구와 과정은 명쾌하다. 책상 위의 종이 묶음과 프린트, 풀과 가위 그리고 스테이플러가 눈에 들어온다.

작업실 가운데에는 개인 작업대 대신 넓은 소파와 탁자가 있다. “제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대학원 졸업하고 작업실에 혼자 있을 땐 몰랐어요. 뉴욕의 창작 스튜디오인 ISCP에 있으면서 대화를 통해 뭔가 해결된다는 걸 배웠어요. 여기서도 작가들끼리 우리 이런 거 해볼래? 저렇게 해볼래 이야기를 해요.” 동료 작가가 있고 여러 큐레이터를 만나면서 재밌는 제안이 오갈 수 있다는 게 큰 힘이다.

“작업실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남겨요. 지금은 이 동네, 창동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역사적으로 창동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고 있죠. 인터넷 블로그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어요.” 깨끗한 작업실 바닥에 놓인 동네 지도가 보인다. 여러 아이디어의 단서인 종이 뭉치가 다이어그램처럼 공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이동하는 곳에서 생기는 아이디어를 작업으로 연결하는 권 작가는 공간의 아주 작은, 어쩌면 불필요한 속성들까지 놓치지 않는다. “작업실이 건조해서 지금 나무책상의 틈새가 갈라져요. 그 위에 이렇게 종이 드로잉을 끼워봤어요.”

◎ 최기창 | 207호 육개장에 침대까지…집이자 작업실

2층 복도 끝 207호의 문을 열었을 때, 최기창 작가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작가의 등 뒤로 빨간 기타와 간이침대가 보였다. 밝은 낮인데도 작업실 불이 꺼져 있었다. 밖의 봄볕과 실내의 어둠이 섞여 옅은 색이 흘렀다. 작업실 바닥은 전시장으로 이동할 새 작업과 포장된 옛 페인팅, 캔버스, 아크릴 물감, 카메라 등으로 빼곡했다.

작가에게 207호는 작업실인 동시에 집이다. 일주일에 5일을 이곳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는다. 작업실 책장에 아크릴물감과 미술잡지도 있지만 육개장과 과자 ‘제크’가 담긴 노란 비닐봉지도 걸려 있다. “여기 있다 보면 몸이 얼마나 피곤한지 저도 깨닫지 못해요. 작가도 운동선수랑 비슷해서 작업 종류에 따라서 특유의 자세가 나오거든요. 100호 이상의 캔버스에 제소 칠을 하는 날은 밤새 팔다리를 쫙 벌리고 캔버스를 말리면서 갖은 정성을 들이며 신이 나 하죠. 다음날 기분은 개운한데 삭신이 쑤셔서 바로 뻗어요.” 이게 작업실의 황홀한 아이러니일까.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지만 자기만의 방에서 며칠 있다 보면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알아차리기 힘든 혹사의 공간이다.

207호엔 작가의 작업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많다. 최 작가의 작업 공구와 재료들은 과학자가 만든 회로도처럼 펼쳐져 있다. 방 한쪽 벽은 완성품으로 보이지만 “아직 고민중”이라는 파스텔톤 유화 작업이 걸려 있다. 작업실 곳곳에는 사슴뿔과 불투명한 거울 등의 오브제 작업이 농담하듯 일상용품 사이에 끼어들어와 있다.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한 뒤 작업 시간이 늘었지만 이웃도 늘었다. 창동 작가들에게 207호는 모임 장소다. “불특정한 시간에 불규칙적으로 작가들과 서로 만나면서 독특한 우애가 생기더라고요. 103호 이완 작가는 밖에서는 신사풍 옷을 입은 배용준인 줄 알았는데 같이 지내 보니 완전 추노꾼도 아니고, 거칠어요.(웃음)” 스튜디오에서 함께 지내면서 숨기려야 숨겨질 수 없는 이웃 작가의 진실을 본다. 아침에 레지던시 복도에서 운동복과 다 찢어진 슬리퍼를 보았을 때의 당혹감은 이곳 생활의 싱싱함이다.

“아, 이거요? ‘3D TV’라는 새 작업이에요. 살짝 불을 꺼야 작업이 눈에 들어와요.”(탁, 스위치를 끈다) 조그만 텔레비전 안에 엘시디로 된 촛불이 들어가 있어 모니터로 빛을 내보내는 작업이 보인다. 207호의 불이 은은하게 꺼져 있던 진짜 이유를 이제 알았다.

세 작가의 이색 작업들

세 작가의 이색 작업들

① 김시원 작가는 지난 17일 창동 스튜디오부터 인천 아트플랫폼까지 걸어가는 프로젝트 ‘막연히 걷기’를 진행했다. 오전 9시에 시작해 밤 10시30분에 도착했다. 13시간이 걸렸다. 집 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각종 필기구를 모은 ‘사용할 수 있지만/사용하지 않는’, 시계와 거울로 만든 ‘무제(반성의 반성)’ 등 일상에 굳어진 사고를 톡 치는 작업들이 많다.

② 권자연 작가는 작업실 공간과 그곳의 흔적에 관심이 많다. 2006년 개인전 ‘조각들-12번가(fragments-12th avenue)’에서는 여러 작가들과 큰 공장을 작업실로 사용했던 경험을 작업으로 풀어냈다. 뉴욕 ISCP 창작 스튜디오에 거주했던 작가는 ‘스톤앤워터-석수시장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거쳐 지금 창동 스튜디오 202호에서 작업한다.

③ 최기창 작가는 그의 스튜디오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 오브제, 비디오, 회화 작업을 섭렵한다. 2009년 12월 열린 개인전 ‘일상의 놀라움(The Marvelous in the Everyday)’에서는 고독한 풍경을 그린 유화 작업을 선보였다. 비디오와 오브제 작업을 병행하지만 창동 스튜디오에 머무는 동안은 멋진 회화 작업에 열심히 집중해 볼 요량이다.

글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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