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4.28 22:07
수정 : 2010.04.2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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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월화드라마 〈동이〉 속 숙종.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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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역사학자에게 들어보는 조선 임금들의 사생활
‘깨방정 숙종, 허세 숙종, 코믹 숙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개그맨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런 별명이 조선왕조 19대 왕 숙종에게 붙여졌다. 문화방송 월화드라마 <동이> 속 숙종(사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하고, 노비인 동이를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궁궐을 사무실로 옮기고, 왕이 입고 있는 의복 대신 세련된 슈트를 입히면 숙종은 어김없이 로맨틱 코미디 속 멋진 실장이나 젊은 사장이다.
요즘 사극 속 왕은 예전과는 존재감이 다르다. 정통 사극이 사료에 입각해 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자세히 비추며 군주로서 그가 어떻게 왕권을 공고히 했는가를 보여줬다면, 2000년대의 사극은 왕의 인간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신분이 낮은 주인공의 삶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한 장치 정도로만 왕을 ‘활용’한다. 왕의 비중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면서 왕의 모습 역시 달라졌다. 왕을 신분이 낮은 주인공과 만나게 하려다 보니 왕의 행동 반경은 궁궐 밖으로 넓어지고, 왕의 말투나 행동 역시 평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 사극 속 왕의 모습은 실제 왕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김기덕 교수(전통문화콘텐츠 전공)의 도움말로 왕의 모습 ‘진실 혹은 거짓’에 대해 살펴봤다. 김 교수는 모든 질문에 이러한 전제를 깔았다. “어떤 것도 ‘그렇다,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 없어요. 역사 사료에 남아 있지 않다고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왕이 양반의 옷을 입고 몰래 백성들이 사는 곳으로 잠행을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이러한 잠행이 가능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왕이 잠행을 나가는 게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고려시대까지는 왕이 밖으로도 많이 다닐 수 있었지만 성리학 사회로 진입한 조선 중기 이후 왕은 최고의 존재이자 궁궐에 갇힌 존재였으니까요. 그럴 만한 이유나 절차가 없으면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요. 세자 시절에도 궁 밖으로 나가는 행동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여겨졌고, 결국 그러한 행동은 왕이 되기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곤 했으니까요.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왕이 너도나도 궁 밖을 나가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잠행을 나가는 게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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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처럼 다정다감하고 인간적이며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왕이 있었을까?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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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처럼 다정다감하고 인간적이며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왕이 있었을까?
“왕은 위에서 말했듯 궁궐에 갇힌 존재였기 때문에 우선 신분이 낮은 이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왕의 성격이 사극 속에서처럼 그랬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왕도 사람이기에 다정할 수도 있고, 화를 내거나 질투를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다만 그런 모습이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인간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죠.”
조선시대 왕의 삶을 살펴본 <조선 국왕의 일생>(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에는 ‘이름 없는 궁녀의 처소에 군주가 갑자기 방문을 한다거나, 거기서 무언가 섬싱이 발생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낭만적일지는 모르지만 가능하지는 않은 이야기’라는 설명이 나온다. 모두에게 공개된 존재인 왕에게 사적인 장소는 그다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에게 완전히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궁금해하는 임금의 인간미 넘치는 사생활이라는 것에 대해 조선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실제로 임금에게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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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속 왕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비슷할까?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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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속 왕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비슷할까?
“인간관계에 제약이 있었을 테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부분에서는 신분의 격차 등이 있었을 거예요. 17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사회가 크게 달라졌는데, 그 전에는 남녀가 호칭 등의 부분에서 좀더 평등했지만 그 이후에는 그렇지 못했죠. 그래도 막상 사랑이 시작되면 남자와 여자로서 둘의 관계는 역시 동등하지 않았을까요? 사랑은 시대를 떠나 보편적인 감정이에요. 사극에서 왕이라고 해도 사랑에 빠지면 질투를 하고 애교를 떨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오히려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해요.”
상상력이 더해진 사극이 주를 이루면서 사극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역사 왜곡’을 외치는 역사학자들의 탄식이다. 김기덕 교수는 “지나치지 않은 정도라면 역사학자들이 때마다 사극을 두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며 “오히려 사극 속 설정과 실제 역사를 비교하고 리뷰하는 글을 쓰는 게 역사가들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사극에 대해 동업자 의식을 갖는 것이 역사학의 확장이자 역사학자의 책무라는 설명이다. “역사에 지나치게 반하는 설정은 시청자들이 먼저 의심해요. 그런 설정이 몰입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러한 설정이 실제 역사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선덕여왕>에서 일식이라는 자연현상을 활용한 부분이나, <동이>에서 악기의 음이 변하는 ‘음변’을 사용한 것은 사극만이 할 수 있는 상상력을 충분히 발현한 경우라고 지적했다. “역사에 남아 있는 부분을 실제 역사에 넣었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발휘하는 지금의 사극은 오히려 역사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지도 몰라요. 역사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전통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없을 테니까요. 결과적으로 역사를 풍요롭게 하는 거죠.” 김 교수는 현대 사극과 정통 사극이 공존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상상력으로 재해석된 역사와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된 역사가 공존한다면 결국 역사의 총량이 커지는 거죠. 현대적 사극이 인기를 끌수록 실제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 역시 늘기 때문에 정통 사극도 흥행성이 충분히 있지 않을까요?”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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