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5.05 20:40
수정 : 2010.05.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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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인기 싹트는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의 세계
슈퍼맨과 배트맨이 맞서 싸운다. 말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건곤일척이다. 배트맨은 ‘체제의 개’라며 슈퍼맨을 비웃고, 슈퍼맨은 그 어떤 명분도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며 배트맨을 저지한다.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의 한 장면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 애니메이션 속의 초인들은 언제나 정의로웠다. 쫄쫄이 복장을 입고 묵묵히 악을 처단할 뿐, 다른 생각들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슈퍼맨>과 함께 탄생하여 숱한 주인공들을 할리우드와 만화영화계에 데뷔시킨 슈퍼히어로 코믹스는 초인들의 역할에 대한 사색이라든가 동시대의 이슈들을 담아내며 진화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려한 그림체는 물론, 문학적 수준의 글맛까지 담아낸 코믹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그래픽노블’이라 부른다. 서구에선 최근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른 그래픽노블의 세계에 대해 알아본다.
소설처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만화책의 한 형태. 그래픽노블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다(위키피디아). 출판사 세미콜론의 강병한 편집팀장은 “코믹스, 망가, 카툰 등 만화에도 여러 분류가 있다. 그중에서 특히 그림과 내용에 공을 들인 코믹스들을 일컫는 말로, 해외에서는 ‘제9의 예술’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한다. 흔히 미국의 신문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얇은 제본의 코믹스와는 달리, 양장본에 가까운 형태로 제작되어 서점을 통해 유통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차이다.
그렇다면 코믹스와 차별화되는 그래픽노블의 문학성이란 과연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 일단 글이 많다. 훌훌 넘기면서 읽을 수 있는 보통의 만화책들과 달리, 그래픽노블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꼼꼼하게 한자 한자 읽어나가야 한다. 그 글은 말풍선 속의 대사일 수도 있고, 지문이나 내레이션일 수도 있다. 심지어 <왓치맨>이나 <시크릿 워>와 같은 작품에서는 가상의 신문기사, 인물들의 인터뷰 녹취자료 등 텍스트로만 이루어져 있는 페이지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수작으로 평가받는 그래픽노블들은 그림뿐만 아니라 바로 그 글의 표현력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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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JLA 탄생의 비밀〉,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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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씬시티’ 이후 한국서 최근 2~3년간 급성장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래픽노블의 탄생 기반인 미국의 코믹스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역사가 일천하다. 개방 이전부터 음성적으로 유통된데다 작풍에서도 국내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일본 만화와 달리, 한국의 독자층에게는 낯선 이 그래픽노블-코믹스 시장이 최근 2~3년 사이 급격히 성장한 데는 무엇보다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이 컸다. 2008년 이후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 시리즈 ‘시공 그래픽노블 총서’를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시공사의 전략마케팅팀 정남익 과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 <300> <씬시티> 등 그래픽노블을 각색한 영화들이 국내에서 화제가 되는 것을 보고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역시 ‘세미콜론 그림소설’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한 세미콜론의 강병한 편집팀장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흥행에 따라 관련 그래픽노블의 판매고도 함께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며 “영화 <다크 나이트>가 개봉했을 때, 배트맨을 소재로 한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높았다”고 밝혔다. 코믹스/그래픽노블의 인기를 토대로 영화화가 진행되는 미국과는 달리,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독자들로부터 새롭게 조명받는 한국의 현실은 그래픽노블의 출간 시기 조정과 마케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최근 <아이언맨2>의 개봉 일정에 맞춰 시공사에서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와 <시빌 워: 아이언맨>을 내놓은 것도 그런 사례다.
물론 영화의 힘이 전부는 아니다. 강병한 편집팀장은 “영화를 계기로 주목받은 작품들의 자체 완성도가 뛰어나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그래픽노블 속 슈퍼히어로들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만나는 모습에서 수십 걸음은 더 나가 있다. 예컨대 최근 개봉한 <아이언맨2>를 보면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이 모여 함께 활동하는 단체 ‘쉴드’가 윤곽을 드러낸다. 이렇게 슈퍼히어로들이 총출동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아이언맨2>의 뒤를 잇게 될 <어벤저스>(2012)가 최초일 테지만, 코믹스의 역사에서 초인들이 최초로 힘을 합친 때는 자그마치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 디시 코믹스 슈퍼히어로들의 단체인 ‘저스티스 리그’가 처음 등장하였고, 1963년에는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오른쪽 기사 참조), 판타스틱4 등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힘을 모았다.
그 50년의 시간 동안,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은 변화된 시대상과 걸음을 함께하며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다채로운 실험들을 선보였다. 2차 세계대전 무렵에 탄생하여 나치의 비밀부대나 일본군들과 싸우는 내용이 상당수를 이루었던 초창기 슈퍼히어로물의 형태를 넘어(심지어 한국전에도 참여한 바 있다), 1960년대에는 <스파이더맨>처럼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슈퍼히어로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뇌는 1980년대, <왓치맨>이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 등의 작품들을 통해 초인들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로 승화되었다. 정의라는 대의에 충실하다고 해도 슈퍼히어로들은 어디까지나 초법적인 존재들. 기껏해야 자경단에 불과한 그들의 활동이 법의 테두리와 어떻게 타협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특히 2000년대 이후 9·11 사태를 계기로 반테러법이 주요한 이슈가 된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며 그래픽노블에서 더욱 첨예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슈퍼히어로 등록제’ 시행을 앞두고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다는 <시빌 워> 시리즈는 대표적인 사례. <배트맨: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에서는 숫제 배트맨이 유혈혁명을 부르짖기도 한다.
9·11 사태 이후 미국 현실도 슈퍼히어로의 고민으로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이유로 코믹스와 그래픽노블을 굳이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있다. 블로그 ‘부머의 슈퍼히어로’를 운영하며 <월드 그레이티스트 슈퍼히어로> 시리즈와 <배트맨: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등 다수의 그래픽노블을 번역한 이규원씨는 코믹스와 그래픽노블의 차이에 대해, “김삼순과 김희진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에 엄선된 작품들이 수입되면서 그래픽노블이 별다르게 주목받고는 있지만 그 또한 코믹스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화라고 하면 왠지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던 구시대의 시각을 배제한다면 그래픽노블의 성취 또한 코믹스의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슈퍼히어로에 대한 동경을 단지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두 팔을 하늘 향해 뻗어대던 유년시절의 매혹으로만 치부하거나, 철없는 취향으로 백안시할 이유도 없다. 보다시피, 우리들이 성장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초인들 또한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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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맨’들, 들어나 봤나?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정도만 알고 그래픽노블에 덤벼들었다간 진도 나가는 데 애깨나 먹는다. 우리에겐 낯설어도 현지에서는 국가대표, 아니 지구대표급으로 손꼽히는 디시와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을 소개한다.
◎ 아톰(디시) | 몸집을 작게 만들 수 있는 슈퍼히어로. 원자 수준으로 작아질 수 있기 때문에 이름도 아톰이다. 전자파, 초고속 인터넷망 등에 올라타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 그린 랜턴(디시) | 외계에서 온 슈퍼히어로 집단.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반지 ‘파워링’이 무기. 2011년 개봉 예정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고 있다.
◎ 그린 애로(디시) | 15년간 군만두를 먹으며 체력 단련을 한 오대수는 실전격투의 달인이 됐고, 무인도에 표류해 사냥을 위해 활을 만든 재벌 2세 올리버 퀸은 활쏘기 초인, 그린 애로로 다시 태어났다. 활을 다루는 슈퍼히어로에는 그 외에도 마블 코믹스의 ‘호크아이’가 있다.
◎ 캡틴 아메리카(마블) | 2차 대전 당시 나치와 싸웠던 애국주의 슈퍼히어로의 원형. 초인 병사를 양성하려는 미군의 비밀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최강의 인간 병기로, 어떤 공격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를 부메랑처럼 사용한다. 2011년 여름에 영화 버전으로 만날 수 있다.
◎ 토르(마블) | 게르만 신화 속 ‘대지의 신’을 슈퍼히어로로 재창조한 캐릭터. 따라서 신에 가까운 막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무기는 ‘묠니르’라 불리는 망치. 역시 2011년,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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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민준 객원기자
zilch92@gmail.com·표지디자인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
자문 이규원·자료 제공 시공사,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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