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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글을 쓰는 ‘그’는 진짜 ‘그’가 아니다.” 친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종종 하던 말입니다. 소설가나 칼럼니스트 등 유명 글쟁이들을 많이 인터뷰한 그 선배는 실제 글쟁이와 그가 쓴 글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폭로하곤 했습니다. 글은 진보적인데 만나보면 ‘마초’라든가, 글은 발랄한데 알고보면 ‘꼰대’라든가, 글은 페미니스트인데 실제는 남자만 좋아한다든가…. 예컨대 포복절도할 만큼 유머러스한 소설을 즐겨쓰는 소설가 성석제씨는 실제 만나보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무참히 깰 정도로 점잖고 진지한 분이라고 합니다. ‘상처와 치유’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소설가 김형경씨의 경우 ‘진지하고 심각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는 분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다들 연애가 9단이고 술과 여자를 밝히는 한량이 아닐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네이버엔 ‘하루키 하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난봉꾼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실제는 어떤가요?’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루키의 실체인즉슨, 여자라곤 22살에 결혼한 대학 친구였던 아내가 전부인 남자입니다. ‘혼란한 시대에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무자식으로 환갑을 맞이한 이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하루키가 원고를 쓰면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게 아내이고, 아내가 출간 여부를 결정하고 하루키는 이에 충실히 따른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일과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규칙이 지배하는 삶입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오전까지 글을 쓴 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조깅을 합니다. 그런 뒤에 중고음반가게 순방을 하거나 볼일을 보거나 혹은 수영을 한 뒤 귀가해서 맥주를 한병 마시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습니다. 그런 뒤 늦어도 밤 10시 전에는 잠이 듭니다. 글 잘 쓰고 돈도 잘 벌고 수십년간 운동으로 다져진 육체를 가진데다 아내밖에 모른다니 제 눈에는 이 시대 최고의 ‘품절남’으로 보입니다. 하루키에겐 할 말 없고 하루키의 아내에게 묻고 싶습니다. “대체 전생에 뭔 공을 쌓았길래 이런 남편을 얻은 거야?” 김아리 〈esc〉 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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