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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수카 암스테르담’. 손 노동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한 대형 걸개그림 아래서 매장 주인이자 디자이너·생산자인 이레너 메르턴스가 셔츠를 꿰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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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지금 유럽에선…뜨겁게 부는 ‘새로운 패션’ 바람지난 4월 초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10분 정도 걷자 젊고 매력적인 거리가 나타났다. 작고 스타일리시한 커피숍과 바, 레스토랑 등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하를레메르스트라트다. 서울로 치면 가로수길 같은 이 거리 한편에 ‘수카’(Sukha)라는 매장이 있다. 디자이너이면서 생산자이자 오너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레너 메르턴스는 손바느질로 옷을 꿰매고 있었다. 그는 삶의 기쁨이 손작업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수카는 윤리적이면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가진 패션·리빙 제품을 취급하는 ‘에시컬 콘셉트’ 매장이다. 수카는 산스크리트어로 ‘삶의 기쁨’이다.
같은 거리에 있는 ‘누쿠히바’(Nukuhiva)는 요즘 뜨는 의류 편집매장이다. 윤리적 패션 제품만을 취급한다. 네덜란드의 오가닉 데님 브랜드인 ‘쿠이치’(Kuyichi), 덴마크의 남성 캐주얼 브랜드 ‘놀리지 코튼 어패럴’(Knowledge cotton apparel), 컨템퍼러리 브랜드 ‘알케미스트’ 등 20여개의 윤리적 패션 제품을 편집해서 제안하고 있다. 지속가능성 그리고 제품의 이면에 숨겨진 윤리성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강조하기 위해 이들은 여행이라는 문화코드를 소비자와 공유하고 소비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누쿠히바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 이름이다.
몇년 새 암스테르담에 이런 에시컬 콘셉트 숍이 부쩍 늘었다. 시민의 25%가 자전거를 이용할 정도로 유독 환경의식이 높아서일까. 2009년 문을 연 또다른 윤리적 패션숍 ‘찰리앤메리’(Charlie&Mary) 쪽에 왜 이런 일을 시작했는지, 고객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품을 구매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쿨하니까.” 파는 쪽이건 사는 쪽이건 윤리적인 게 독특하고 그래서 쿨하다고 여긴다는 얘기.
시민운동에서 시작해 브랜드 만들어 혁신
트렌디한 매장과 노천카페 등이 몰려 있는 프랑스 파리의 마레지구 템플가에 자리한 ‘알터문디’(Alter Mundi)는 윤리적 라이프스타일 숍을 표방하며 5년 넘게 버티고 있다.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파리에만 3개, 프랑스 전역에 7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알터문디를 통해 윤리성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작은 브랜드와 소규모 생산자들은 윤리적 소비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역할과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알터문디는 프랑스 정부와 시민사회가 수여하는 ‘자뉘스 뒤 코메르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윤리적 디자인과 대안적 소비를 연결시켜 사회연대를 증진시켰다는 게 선정 이유다.
2004년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에서 탄생한 윤리적 패션 브랜드 ‘에키오그’(Ekyog) 역시 지금은 파리에만 12개, 전국적으로 42개의 매장을 가진 중견 브랜드로 성장했다. 생제르맹 거리의 매장 매니저 유니스는 “처음엔 요가복을 만들었지만 소비자들이 더 다양한 스타일을 원해 지금은 여성·아동을 위한 토털웨어를 지향하고 있다”고 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유기농 면으로 옷을 만들고 수익의 10%는 물 부족 대응기금에 기부하면서 에키오그는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에키오그의 소비자들은 이런 가치까지 스타일로서 향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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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윤리적 패션숍 ‘찰리앤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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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경우, 우리로 치면 아름다운가게와 같은 ‘솔리다리다트’(Solidaridad)라는 시민단체가 30여년 전부터 공정무역커피를 보급해왔다. 그러다가 공정무역의 범위를 면화제품까지 확대했고, ‘메이드바이’(http://made-by.org) 같은 윤리적 패션의 구조를 만드는 단체를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시민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오가닉 데님 브랜드 ‘쿠이치’가 그렇게 탄생해 성공했다. 한편에선 메이드바이가 기존 의류업체에 윤리적인 공급 사슬을 소개하고, 다른 한편으론 쿠이치가 성공 사례를 만들어온 셈이다.
영국 런던은 새로운 패션의 중심지답게 세계적 브랜드와 유통업체들을 압박하는 소비자 운동을 통해 윤리적 패션의 사회적 문맥이 형성됐다. 라벨 이면의 노동(Labour Behind Label), 빈곤과 싸우는 패션(Fashion Fights Poverty) 등의 시민운동이 의류업계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하면서 패션의 윤리성에 대한 인식을 깨우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들은 매년 대형 패션브랜드와 유통업체의 윤리성을 조사해 발표한다.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 막스앤스펜서가 2007년부터 ‘플랜A’라는 지속가능 프로그램을 전면적으로 시행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감시와 견제 통해 지속가능성 관심 높이기도
다른 한 축은 친환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일상에 접목시켜온 젊은층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문화였다. 예컨대 암스테르담의 ‘스트로베리 어스’(Strawberry Earth)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이렇다. 특정 레스토랑에 몰려가 파티를 하고 놀면서 매상을 올려주는 대가로 레스토랑을 친환경적인 콘셉트로 바꾸도록 만들기. 특정 호텔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며 호텔을 친환경적인 호텔로 바꾸기. 스트로베리 어스의 설립자 메터(Mette)는 “지루한 계몽이 아니라 창의적인 방식으로 함께 행동할 때 사람들이 변화한다”고 말한다.
지난해에는 윤리적 패션을 소개하는 쇼를 열었는데, 참가한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모두 팔아치웠다.
런던의 윤리적 패션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달라지고 있다. 4년 전부터 런던패션위크에서는 매 시즌 윤리적 패션을 별도로 소개하는 섹션인 에스테티카가 열린다. 이를 통해 크리스토퍼 레이번 등의 주목받는 패션디자이너들이 윤리성과 창의성을 결합시킨 자신의 작업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런던패션학교(LCF)는 정부·기업의 후원을 받아 ‘지속가능 패션센터’를 설립해 패션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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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에시컬 패션 포럼’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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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패션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제아무리 유럽이라도 윤리적 패션에 대한 시민들의 주류적인 흐름은 아직 무관심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분위기는 크게 바뀌고 있다. 패션이 발 딛고 선 지형 자체의 변화, 패션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넘어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년간 의류 가격은 줄곧 떨어져 왔지만 앞으로는 오를 일만 남았다. 이러한 변화가 패션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메이드바이 제너럴 매니저 에스터르 페르뷔르흐)
이런 영향 때문인지 새롭게 등장하는 많은 브랜드들, 특히 주류 시장을 겨냥하는 브랜드들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런던에서 론칭한 프리미엄 데님 브랜드 ‘트라우저 인 런던’(Trousers in London)은 윤리적 패션을 표방하진 않지만, 전 제품을 오가닉 데님으로 구성하고 있다. 유럽뿐만이 아니다. 마이클코어스의 수석디자이너, 앤 클라인의 부사장 등을 거치며 뉴욕패션계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으로 꼽히는 디자이너 테드 김이 준비중인 브랜드 역시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콘셉트를 브랜드 에센스로 삼고 있다. 테드 김은 “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브랜드를, 가치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바라고 있다”고 설명한다.
윤리적 패션은 유행을 넘어 시대적 트렌드가 될 수 있을까? 파리의 유서 깊은 컨벤션 업체인 메세 프랑크푸르트 프랑스의 사장 미하엘 셰르페의 말에서 답을 찾아볼 수 있겠다. 메세 프랑크푸르트는 에시컬 패션쇼를 인수해 지난해부터 함께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환경과 지속가능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커다란 사회·문화적 경향성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난 800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윤리적 패션업계에 있는 사람들과 새로운 시대에 맞는 경제적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암스테르담, 파리, 런던=글<30FB>사진 김진화/사회적 기업가<30FB>오르그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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