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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문을 연 ‘온달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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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70년대 영양간식에서 추억과 향수, 건강까지 도모하며 부활하는 전기구이 통닭
째깍째깍, 모서리가 깨진 괘종시계의 바늘이 자정을 향해 달린다. 어린 철수는 졸린 눈을 부릅뜬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철수와 동생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이불을 박차고 달려간다.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에게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뒷전이다. 와락 달려가 잡아챈 것은 누런 봉투였다. 세상 행복을 다 가져다줄 고소한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기름종이보다 얇은 껍질을 뜯고 눈처럼 하얀 속살을 입에 가져간다.
40, 50대에게는 낯익은 70년대 풍경이다. 지금처럼 기름에 튀기고 조각난 닭이 아니다. ‘영양센터’ 문구가 큼지막하게 찍힌, 기름을 쫙 뺀 담백한 전기구이 통닭이다. 70년대 후반 튀김통닭과 80년대 미국식 프라이드치킨이 수입되면서 점차 사라졌던 전기구이 통닭은 최근 건강과 참살이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금씩 부활을 꿈꾸고 있다.
전기구이 통닭의 원조는 1960년 명동에 문을 연 ‘명동영양쎈타(센터)’로 보는 게 정설이다. 20대부터 그곳에서 일했던 임영자(70)씨는 “회장님(김태훈)이 외국에 다니시다 (통닭구이 요리를) 보고 들여왔다”고 전한다. 명동영양센터는 단박에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음식칼럼니스트 김학민씨는 “요리과정이 복잡한 백숙이나 삼계탕 같은 요리가 다였던 시절 간편한 조리법의 통닭이 등장한 건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한다. “배고픔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경제적으로 약간 나아지면서 ‘영양’이란 개념이 생겼고” 그 관심과 결합한 것이 통닭이었다. ‘영양센터’란 조어는 통닭에 딱 어울리는 단어였다. 이전 우리 음식에도 통째로 굽는 닭요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로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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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구이통닭 원조집 ‘명동영양센터’의 1960년 외관(위) 성북구 일대에서 유명한 ‘온달치킨’을 찾은 주민 조호연씨와 친구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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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통닭집
맞선 장소로도 인기 명동영양센터는 신성일, 엄앵란 같은 당대 유명인이 찾았고, 그 이름을 따 전국에 ‘○○영양센터’라는 이름의 가게들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전기구이 통닭집의 번성에는 60년대 수입된 미국 육계 종자도 한몫을 했다. 30일이면 1.5㎏ 정도 자라는 육계는 7개월을 키워야 고작 2㎏인 토종닭에 비해 생산성이 높았다. 전기구이 통닭은 새로운 풍속도도 만들었다. 홀딱 벗은 닭이 유리창 안에서 꼬챙이에 꽂혀 돌아가는 풍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들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맞선 장소로도 인기가 좋았다. 처음 만난 어색한 남녀는 바삭한 닭다리를 서로 뜯어주면서 기름진 눈빛을 교환했다. 남녀간의 애정이 쫄깃한 닭 살집에서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나 12월31일에는 통닭을 사려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968년 12월24일 한 일간지의 신문광고에는 선물 꾸러미를 달고 썰매를 끄는 산타클로스와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각 가정마다 X마스와 年末(연말) 年始膳物(연시선물)은 가장 오붓한!!! 자양쎈타 전기구이 통닭.’ 전기구이 통닭은 당시의 보통 집안 형편에 싼 음식은 아니었다. 통닭집들의 이런 광고 전략은 요즘 과자회사들의 빼빼로데이 광고 전략처럼 먹혔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해준 전기구이 통닭은 투명인간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먹을거리는 사라져갔는데 쇠막대기에 꽂아 돌리는 방식만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고문기술로 이전됐다. 기름기 뺀 구이식 치킨
참살이 바람 불며
프랜차이즈 속속 오픈 전기구이 통닭은 왜 사라진 것일까? 더 간단한 조리법의 튀김통닭 등장이 큰 이유였지만 “삼겹살이 등장하면서 ‘영양’의 상징이던 통닭의 위상도 떨어졌다”고 김학민씨는 분석한다. 당시 시장통마다 가마솥에서 튀겨낸 고소한 닭 냄새가 진동했다. 저렴한 식용유의 보급도 한 이유였다. 때맞춰 튀김통닭 프랜차이즈가 생겼다. 1977년 개업한 ‘림스치킨’은 국내 최초 튀김통닭 프랜차이즈다. 신세계백화점에 1호점을 개점했다. 1984년 미국 ‘백인 할아버지’가 들머리에 떡 버티고 있는 ‘케이에프시’(KFC)가 수입되면서 치킨 프랜차이즈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식 프라이드치킨은 미국 노예제도와 뗄 수 없는 음식이다. 노예들은 백인 농장주들이 닭의 살코기만 먹고 날개나 닭발 등을 버리자 튀김옷을 입혀 튀겨내 먹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만든 치킨은 바삭하고 맛났다. 참혹한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 80년대 한국에서는 인기 있는 외식으로 잡았다. 튀김통닭의 아성을 흔든 것은 매콤한 양념통닭이었다. 역시 프랜차이즈였던 ‘페리카나’가 선두주자였다. ‘처갓집 양념통닭’, ‘멕시카나’ 등 줄줄이 생겼다. 90년대 중반 ‘미국식 프라이드치킨을 동네에서 배달시켜 먹는다’는 발상으로 시장을 석권한 ‘비비큐’(BBQ), 후반 경상도에서 간장치킨을 들고 나타난 ‘교촌치킨’ 등 그야말로 치킨시장은 다양한 맛으로 사람들의 혀를 잡아끌었다. 찜닭, 불닭 등도 이어 나타났지만 인기는 짧았다. 전기구이 통닭 업그레이드한
복고풍도 일어나기 시작 2000년대 참살이 바람을 타고 기름이 쪽 빠진 구운 치킨을 내세운 ‘굽네치킨’이나 숯불바비큐치킨 ‘훌랄라’도 등장했다. 최근 재미있는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는 ‘오븐에 빠진 닭’(일명 오빠닭)도 튀기지 않고 오븐에 구운 닭이 메뉴다. 이런 치킨업계의 참살이 바람은 전기구이 통닭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기구이 통닭은 오븐에 굽는 식과 비슷한데다 누런 봉투를 들고 퇴근하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도 맞물렸다. 프랜차이즈 업체도 생겼다. 깐부치킨은 전기구이 통닭을 주메뉴로 2005년에 문을 열어 현재 가맹점 포함 106개 매장을 운영한다. 깐부치킨의 하태환 전무는 “옛날 입맛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내다봐 시작했다”고 한다. 매장 수가 1000개가 넘는 1위 업체 비비큐(2011년 상반기 기준)에 비해 기지개 수준이지만 20~30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치열한 치킨시장에서 전기구이 통닭을 업그레이드한 복고풍”도 일고 있다고 전한다. 깐부치킨은 배달을 하지 않는다. 매장은 마치 세련된 카페와 비슷하다. 요즘 치킨 프랜차이즈의 추세다. ‘치르치르’도 전기구이 통닭을 내세운 프랜차이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앞에서 1981년부터 전기구이 통닭을 팔았던 ‘삼성통닭’도 7년 전 ‘삼통치킨’으로 이름을 바꾸고 3년 전부터는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다. 현재 가맹점 55개가 생길 정도로 확장세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포장과 통닭으로 서울 마포 일대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옛날통닭’ 주인 공두에(37)씨도 다음달부터는 상호를 ‘고일통닭’으로 변경하고 전기구이 통닭을 선보일 예정이다. 2011년 공정거래위원회 발표를 보면 치킨 프랜차이즈 매장의 시장 규모는 약 5조원, 매장 수가 500개가 넘는 브랜드는 약 10개 정도라고 한다. 전국 치킨집은 약 5만곳으로 추정한다. 그야말로 치열한 전쟁터다. 글 박미향 기자·도움말 강병오 (주)FC창업코리아 대표·참고도서 <차별받는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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