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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7 18:52 수정 : 2012.06.28 14:01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하루가 끝나는 시간 밤 걷기 하는 도보 인구 증가…
건강 관리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명상·힐링 기능도

밤은 어둠의 시간. 날은 저물고 생각은 내면으로 도드라진다. 그날을 되새김질하고, 계획을 여물게 하기 제격이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무념무상.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걷는 동안 생각의 가닥이 자리잡는다. 신경 쓸 일 많은 주부나 직장인에게 딱이다. 저녁 무렵 사위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회색 도시가 색깔을 입는다. 잠시 전에 떠나온 도심과 그곳에 남겨둔 자아를 바로 보는 또다른 자아가 탄생한다. 야경 감상은 덤이다.

14일 저녁 7시 반. 한낮 더위가 한풀 눅어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한성대입구역 출구. 목요 저녁걷기 모임에 나온 중년 남녀 10명이 수인사를 했다. 닉네임으로 통하는 이들은 굳이 서로 이름을 묻지 않았다. 식구들의 저녁상을 차려두고 서둘러 나온 주부들, 회사 일을 끝내고 운동화를 갈아 신은 직장인들이다. 대개는 50대, 개중에 40대와 60대가 섞였다. 이날 깃발(인도자)은 꿈낭구(59·남). 한성대입구역~성북천~청계천~중랑천~한양대역 전철역이 코스다. 천변길로 내려가자 바로 걷는다. 그야말로 다짜고짜다.

목요 저녁걷기 모임 회원들. 임종업 기자
“오감이 되살아났어요.
차타고 가면 스쳐 지나가던 것들
풀, 돌, 물, 새소리가 생생해졌죠”

2010년 6월 복원된 3.6㎞ 성북천에는 맑은 물이 흘렀다.

소녀 같은 목소리의 공주할매(63). 할머니가 무슨 힘이 그리 좋은지 작은 몸에 배낭을 멘 걸음걸이가 당차다. “3년 전 자전거를 타다가 중랑천 다리에서 떨어져 두달 동안 입원한 적이 있어요. 몸이 아프니 10살에 죽은 아들 생각도 나고 편두통이 심해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살아 있으면 마흔다섯살이에요. 작년에 걷기를 시작하면서 약을 끊었어요.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 싶어요. 지금은 밤 걷기를 하고 나면 약을 먹지 않고도 잘 자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와” 하며 한군데로 시선이 쏠린다. 텃새가 된 청둥오리가 새끼를 거느렸다. 잠시 오리가족을 구경하고 다시 잰걸음이다. 회색빛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한다. 옹벽 위 시가지의 불 밝힌 건물들이 물 위에 거꾸로 비친다. 꺾어져 내려온 도시의 소음이 아득하다.

맨 뒤에서 ‘유실물’을 처리하며 따라오는 라이프(51·남)는 리시버를 꽂고 음악에 심취해 있다.

“15년간 담배를 하루 두갑 피웠어요. 100m를 겨우 걸을 정도였어요. 걷기를 시작한 지 6년, 컨디션이 최고예요. 여름밤에 땀을 흘리고 나면 니코틴이 빠져나가 몸이 거뜬해지더군요.” 그는 수능을 보는 기분으로 올해 4월 원주에서 열린 울트라걷기대회에 참가해 100㎞를 16시간11분에 끊어 7등으로 골인했다며 대회에 덴마크인 9명이 참가했는데 그 가운데 한명은 100㎞를 660번 완주했다더라고 했다. 그는 마라톤이나 등산이 격렬한 운동이어서 다치기 십상인데 걷기는 무릎에 부담이 안 돼 나이 든 사람이나 여성에게 아주 좋다고 말했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계천과의 합수머리에 이르렀다. 돌다리를 건너자 시청에서 흘러내린 물길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과 합류했다. 청계천 마지막 다리인 고산자교를 지나 중랑천 넓은 공터에 이르자 중년 여성 100여명이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 춤을 춘다.

8시 반께. 한 시간 땀 나게 걷고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 쉼터 탁자에 둘러앉았다. 각자 배낭에서 간식거리를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삶은 감자, 방울토마토, 부침개 등. 보온병에 담아온 오미자, 홍차를 컵에 담아 냈다. 플라스틱 요구르트 용기가 컵이다. 살림살이의 알뜰함이 묻어난다. 꿈낭구가 “홍차 맛이 죽여준다”고 추임새를 넣자 누군가 “나도 죽어보자”며 빈 컵을 내민다. 급한 이는 화장실을 가고 아람치(42·남)는 잠시 휴대전화로 중계하는 야구경기에 빠져들었다. 평일 밤, 귀가하는 차들이 붕붕거리는 고가도로 아래서의 즐거운 야참. 이들에게 밤길 걷기는 영락없는 밤소풍이다. 10분 휴식 끝.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면서 사소한 일상은 소멸하고 이야기는 내면으로 침잠한다. 여장부 스타일의 나도걷지(47)는 걷기 5년차다.

목요 저녁걷기 모임 회원들. 임종업 기자
“밤길 걸으면서 나를 돌아봐요.
동료에게 짜증부린 것
식구한테 화낸 것
나 자신이 정화되는 느낌이죠”

“오감이 되살아났어요. 차를 타고 가면 그냥 스쳐 지나가던 것들, 예컨대 풀, 돌, 물, 새소리가 생생해지고 느낌이 팍팍 와요. 무덤덤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새롭고요. 가끔 가는 산행이 자연에 파묻혀 즐겁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상을 오른다는 목적이 더 강하죠. 하지만 걷기는 과정이 있을 뿐 목적이 없어요. 어쩌면 그 자체가 목적인지 몰라요. 순간순간이 다 중요하달까요. 그러면서 시간의 자도 달라졌어요. 목적과 목적 사이의 거리로 측정되던 것이 ‘사이’가 꽉 들어차면서 시간이 촘촘해집니다. 또 버스나 전철 외에 또다른 운송수단이 생겼어요. 전에는 기다리던 차가 오지 않으면 짜증을 냈는데, 이제는 무작정 기다리느니 차라리 걸어요.”

그런데 이름 대신 닉네임을 쓰는 이유는 뭘까?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언젯적 화제인데….”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꿈낭구가 우스개 이야기를 곁들여 어색함을 푼다.

“낚시 카페에 가면 별의별 이상한 닉네임이 많아요. 미끼머쓰꼬, 워매내찌, 물거나말거나, 오드리햇반 등등. 이건 19금인데…, 여섯시 내고환, 귀두까기인형도 있어요. 하하. … 주부가 되면서 이름을 잃어버린 중년 여성들이 새로운 이름을 얻는 거죠. 닉네임으로 불리면서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서로 편안한 측면도 있고요.”

9시20분. 종착점인 한양대역이 가까워지면서 대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저녁 겸 일행의 간식으로 삶은 감자와 방울토마토를 챙겨온 강물(52)은 “비슷한 연배끼리 건강 얘기, 살림 얘기 등 부담 없는 대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털어낸다”고 했다.

“나쁜 밤공기 마시면서 무슨 걷기냐고들 하는데, 찻길에서 조금 벗어나면 공기가 참 달라져요. 서울에 이런 데가 있나 싶을 정도죠.” 그는 친구들이 체중이 5~6㎏이 빠져 날씬해지고 성격도 쾌활하게 변한 자기를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친구인 강물을 따라온 아야짱(52·여)은 평소 8시에 끝나는 직장 일을 서둘러 끝냈다고 했다.

“함께 걷자고 친구가 전화를 해왔어요. 반년 만에 만났지요. 그동안 못 나눈 얘기를 나누었어요. 아픈 적도 없고 몸이 아직 쓸 만은 해요. 하지만 오래도록 건강하려면 걷기처럼 안전한 운동으로 몸을 아껴야죠.”

9시 반. 한양대역 역사에 들어온 일행은 “얄짤없이” 헤어졌다. 다음에 또 보자면서. 두시간 동안의 짧은 밤외출을 마친 이들은 서둘러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걷는 내내 말이 없던 인토토(46·여). 며칠 뒤 전화를 통해 말했다.

“숫기가 없어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었어요. 생활도 단순해 직장과 집을 오가는 게 다였어요. 밤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다양한 분들과 만나면서 닫혔던 마음 문이 열렸어요. 시야도 넓어졌구요. 요즘 잠시 직장을 쉬고 있는데, 풀어지기 쉬운 몸과 마음을 다잡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돼요. 삶의 멘토를 얻었달까요?”

18일 밤 안양천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돈사냥(50·여)의 말.

“밤길을 걸으면서 뒤를 돌아봐요. 동료에게 짜증을 부린 것, 식구들한테 화낸 것 등등. 내가 조금만 더 참고 양보할걸. 나 자신이 정화되는 느낌이죠.”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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