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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알랭 드 보통, 에쿠니 가오리까지 왜 여성은 연애의 아포리즘에 열광할까
사랑 이야기는 감정이입이 쉽다.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이고 경험이기 때문에 감정이입하기가 쉽고 타인의 삶에서 내 사연을 길어올리기가 수월한 편이어서다. 한가지 더. 내가 해볼 수 없는 극한의 애절함을 대리경험할 수도 있다. 고전으로 분류되는 소설 중에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한 많은 책들이 사랑과 돈, 권력을 비롯한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테마를 아름답게 직조해내지 않았던가. 취미에 ‘독서’를 적는 도시 여자들에게 사랑을 다룬 에세이와 소설들은 들고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고, 블로그나 에스엔에스(SNS)에 인용하기 좋으며,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장점으로 다가간다. 누군가는 개탄해 마지않을 트렌드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들은 충실한 독자층을 갖고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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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비루한 연애를
그럴듯하게 되새기게 해주더라”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오랫동안 연애담의 첫 경험으로 기억하는 30대 회사원 홍나은씨는 ‘그 장르’를 오래전에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이런저런 남자를 겪다 보면 그 정도의 회의주의는 기본으로 장착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다 알랭 드 보통을 알게 되었다. 사랑에 대해 이 영국 남자가 하는 말이 어찌나 쏙쏙 귀에 와 박히는지. 직장 동료들에게 말했더니 다른 작가에 대한 추천이 뒤따랐다. 에쿠니 가오리. “솔직히 책 한권 읽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 없기도 하고, 인터넷 뉴스와 게시판이 글 읽기의 전부이다 보니 길고 복잡한 글을 읽으려고 하면 몇장 보다가 덮는 일이 많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내가 겪은 비루한 연애를 더 그럴듯하게 되새길 수 있게 해주더라. 내 경험을 미화하게 도와주는 느낌?” 술자리에서 넋두리로 털어놓던 이야기를 감성적인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올릴 만한 경험으로 치환하는 데 연애소설과 에세이의 구절들은 도움이 된다. 그렇게 쓰고 나면 “되풀이하기는 싫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추억이 되는 것 같다. 소설 속 그녀처럼 살고, 사랑하고 싶다고 주인공을 보면서 다짐한다. 현실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가려는 심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읽다 보면 사랑스럽고 행복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 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같이 식사를 할까. 반짝반짝 닦인 유리창에 전등빛이 어리고 있다’면서, 알코올 중독자마저도 모두 얄팍한 유리 안에 있다는 거다. 읽다 보면 정말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별볼일 없는 풍경을 차단하는 유리문을 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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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보문고 전자책(이북) 사이트. 2.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이북 판매도 9만부에 육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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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난 도피적 사랑 이야기
외국에서도 큰 인기 사랑을 책으로 배울 수 있을까? 나디아 코마네치의 10점 만점 경기를 본다고 체조선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먼저 자문해보라. 불가능함을 몰라서 읽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자 심리를 알고 싶어서, 내 실패한 사랑을 위로받고 싶어서 공감할 책을 찾게 되는데, 그 책들이 최소한 가려운 곳은 확실히 긁어주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유럽에서는 현실 연애에 피곤을 느낀 알파걸들이 ‘인간 휴양림’ 같은 남자들(사회적 성취는 미흡하지만 사랑만큼은 뜨겁게 하는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에 열광한다. 스웨덴 작가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와 프랑스 작가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시작은 키스!>가 그런 책들이다. <옆 무덤의 남자>는 1998년 발표 이후 스웨덴에서 50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스웨덴 국민 20명 중 1명이 읽은 ‘국민소설’이 되었다. <시작은 키스!>는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사랑받았다. 재벌 2세가 어느날 마차를 끌고 와 유리구두를 신겨주는 것만큼이나, 효과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든 판타지다. 이 출판시장에 남자 독자들은 별로 존재감이 없다. 데이트 컨설턴트라고 할 수 있는 레이철 그린월드는 <그는 왜 전화하지 않았을까>에서, 왜 이런 책을 남자를 위해서는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한다. 쓰고 싶다, 남자들이 읽는다면! 이런 연애물 시장에 부는 가장 큰 변화는 독자들이 창작자가 되기를 원하고, 시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작품을 발표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 연재를 통해 인기를 끈 귀여니의 <늑대의 유혹>을 비롯한 책들이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듯이, 인터넷에는 로맨스소설을 창작하는 소모임이 많고, 전자책(이북) 단말기가 퍼지기 이전부터 로맨스소설의 이북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북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작가가 종이책을 출간하는 일은 관행이다. 30대 후반인 주부 김유선씨는 오래전부터 동네 책대여점에서 책을 빌려 읽어왔다. 대학교를 다니던 90년대 중반에 <국화꽃 향기>를 필두로 김하인의 책들을 읽은 게 시작이었다. “대여점에 가면 로맨스소설을 주로 빌려 읽는다. 한국 작가들 책이 많이 나온다. 남편이 이런 책 읽는 걸 싫어했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나 <해를 품은 달>이 드라마로 인기를 끌면서 좀 당당해졌다고 해야 하나.” 출판마케터인 박유경씨는 친구들과 모이면 자주 하는 얘기가 “너도 하나 써라”다. 이북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류 출판계가 모르던 세계가 이미 그곳에 존재할 뿐 아니라 방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생긴 일이다. “그래, 우리 다 사랑과 섹스에 대해 알고 있잖아?”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봤어? 내용 별거 없어, 고등학교 때 애들끼리 숱하게 돌려보던 할리퀸 로맨스를 더 높은 수위로 쓰는 거라니까. 드라마가 되면 금상첨화고.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쓴 작가 보라니까. 쓴다고 책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 여자들도 일단 쓰기 시작한 거잖아. 음지에서 글 쓰고 양지를 지향하는 거다.(웃음) 본명을 써야 하는 부담도 없잖아.” 글 이다혜 <씨네21>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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