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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서부의 고도 베스프렘 옛 도심 언덕의 이슈트반 왕과 기셸라 왕비 상 옆에서 내려다본 베네딕트 언덕과 주택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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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헝가리 소도시 여행
서볼치서트마르베레그,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 세케슈페헤르바르… 도무지 여행자를 불러모을 것 같지 않은 도시 이름들.
하지만 긴 시간을 품은 아름다운 거리와 아늑하고 고요한 숲, 기품있는 성과 비밀스런 동굴로 매혹하는 반전의 헝가리 소도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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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폴처에선 비좁은 석회동굴을 쪽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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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때 곤혹스런 경우 중 하나가 아주 길고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을 만날 때다. 예컨대 헝가리는 서볼치서트마르베레그주, 야스너지쿤솔노크주, 죄르모숀쇼프론주 등 19개의 주로 이뤄진 나라다. 이번 여행은 헝가리 북동부의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주에서 시작해 부다페스트와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거쳐 서부의 베스프렘주로 이동하는 긴 여정이었다. 곤혹스러워도 방문지 위치 파악을 위해선 알아두지 않을 수도 없는 지명들이다.
어쨌든, 이런 긴 지명들만큼이나 긴 것이 헝가리 평원에 깔린 지루할 정도로 긴 옥수수밭, 해바라기밭 행렬이었다. 그 너머로 다시 갈색 밭과 검은색 밭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게 궁금했다. 가이드가 말했다. “갈색 밭은 시든 옥수수밭이요, 검정 밭은 시든 해바라기밭이죠.” 이것들 말고는 기댈 언덕, 비빌 산등성이 하나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있을 게 다 있었다. 다가서자 곳곳에 키다리 나무들 우거진 울창한 숲이 기다렸고, 숲가엔 아름답고 유서 깊은 작은 마을들이 깃들어 있었다.
명성 자자한 유적도시 부다페스트를 제쳐두고, 헝가리 평원을 오가며 국내에 비교적 덜 알려진 색깔 있는 도시들을 찾았다. 헝가리 서부 베스프렘을 거점 삼아 천년 수도원과 백년 숲길을 간직한 지르츠, 언덕 위의 옛 성채와 마상무예 경기로 이름난 쉬메그, 쪽배 타고 석회동굴을 탐방할 수 있는 터폴처, 그리고 벌러톤 호수 전망이 아름다운 호반도시 티허니 등을 둘러봤다. 지명도 짤막해 일단 안도감부터 드는 곳들이었다.
베스프렘은 베스프렘주의 주도로 9세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다. 7개의 언덕에 형성된 옛 거리 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 중세 모습을 많이 간직한 곳이, 현재 베스프렘 시청이 자리잡은 언덕의 성채 거리다. 화재감시탑이 있는 오바로시 광장에서 반질반질한 옛 보도블록이 깔린 거리를 걸어 올라 영웅문을 지나면, 헝가리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과 왕비 기셸라가 살던 성(뒤에 주교관으로 사용)과 기셸라 왕비가 결혼 때 축성을 받았던 성당, 페스트 퇴치 기념탑 등을 만난다. 거리 골목에선 유명한 신발 장인인 라슬로 바스가 운영하는 예술박물관 등 미술관·전시관들도 둘러볼 수 있다. 1938년 초대 국왕 사후 900주년을 기념해 세웠다는 이슈트반·기셸라상 옆 시내 전망이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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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허니의 베네딕트 성당 옆 공원은 벌러톤 호수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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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프렘 북쪽 인구 7000명의 소도시 지르츠는 12세기에 성베르나르가 헝가리 첫 시토회 성당을 세운 도시로 이름 높다. 시토회는 가톨릭 개혁 수도회의 한 갈래로, 엄격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성직자 교육활동을 주로 해온 종파다. 옛 성당은 16세기 튀르크족의 침입으로 파괴됐다. 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현재의 성당 건물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것이다. 방문자센터에서 성베르나르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들과 유품 등을 볼 수 있다.
지르츠 거리에서 옛 모습은 많이 찾아볼 수 없다. 꼭 들러볼 만한 곳이 마을과 성당을 끼고 펼쳐진 19세기부터 가꿔온 아름다운 숲(지르츠 어르보레툼 공원)이다. 아담한 호수가 포함된 19㏊의 울창한 숲에 아름드리 소나무류 등 침엽수와 왕버들 등 활엽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풍뎅이 날고 민달팽이 기는 숲길을 따라 주민들은 거닐고 학생들은 화폭을 펼치고 자리를 잡는다. 알밤처럼 떨어져 뒹구는 굵직한 마로니에 열매는 아이들 차지다.
세계 3대 명품 도자기 생산지라는 헤렌드 도자기공장을 거쳐 베스프렘주 서쪽의 고도 쉬메그에 닿았다. 쉬메그는 높이 270m의 언덕 위에 세워진 멋들어진 성이 돋보이는 소도시다. 이 쉬메그 성은 13세기 왕 벨러 4세가 쌓은 것이다. 16세기 튀르크 침입 때 베스프렘의 주교구가 이곳으로 난을 피해 이전해 오면서 도시가 발달했다고 한다. 헝가리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크다는 이 성은, 밑에서 올려다봐도 위에서 거리를 내려다봐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아름다운 성이다. 인기를 끄는 건 쉬메그성 밑에서 매주 수·토요일(6~8월은 매일) 벌어지는 마상무예 경기다. 헝가리 전통 무술인 말 타고 달리며 활쏘기, 창던지기, 창과 방패의 대결 등을 지켜볼 수 있다. 경기를 본 뒤엔 중세식 저녁식사가 기다린다. 기다란 동굴 안의 어두운 식당에서 40도가 넘는 독주 펄린카를 곁들여, 포크·나이프 없이 숟가락과 손만으로 수프와 빵, 거위 다리 구이 등을 먹는다. 쉬메그성과 주변 시설들은 모두 개인 소유다. 1989년 헝가리 민주화 뒤 개인이 쉬메그성을 사들였고, 마상무예 경기장과 호텔, 중세식 식당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13세기 쌓은 쉬메그성
전통 무술 마상무예경기 본 뒤
동굴 안 어두운 식당에서
숟가락과 손으로만 먹는
중세식 저녁식사
온천은 헝가리 말로 터폴처다. 베스프렘주 서남쪽에 인구 1만9000여명의 소도시 터폴처가 있다. 헝가리는 온천이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다. 부다페스트 세체니 온천과 미슈콜츠의 동굴온천이 유명하다. 여행객들은 온천욕 대신 동굴호수 탐방을 즐긴다. 섭씨 18~20도의 용출수가 만들어낸 석회동굴을 쪽배를 타고 둘러본다. 1370만년 전 형성된, 3개 층으로 이뤄진 이 동굴호수는 1902년 발견됐다.
18㎞에 이르는 긴 동굴이지만, 250m 구간만 일반에 공개된다. 이 중 180m 길이의 비좁은 동굴을 쪽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수심은 0.4~3m인데, 조명을 설치해 물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곳 동굴 무리는 정부 지정 환경보호구역이다. 광산 개발로 한때 동굴 속 물이 모두 빠져버렸으나, 광산을 폐쇄하자 물이 다시 차올랐다고 한다.
터폴처는 2000년 전부터 형성된 옛 도시로, 일찍부터 지중해나 흑해 연안 상인들과 유럽 내륙 상인들의 무역 통로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주로 19세기에 건축된 건물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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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르츠의 시토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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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서쪽 중앙에 동서로 길게 누운 호수가 헝가리 최대 호수 벌러톤호다. 2만5000년 전 형성된 이 호수를 헝가리인들은 ‘헝가리 텐게르(바다)’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투명한 물 찰싹이는 물가에 서서 바라보면 길이 80㎞, 너비 10㎞, 평균 수심 4m의 이 얕은 호수는 영락없는 바다 모습이다. 경찰 순시선을 제외하곤 무동력 배만 허용되는 청정 호수다.
이 호수 북쪽 연안 중앙에 튀어나온 작은 반도가 하나 있다. 인구 1200명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 티허니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11세기에 처음 건축된 베네딕트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들어선 반도 전체가 역사보호지구로 지정돼 있다.
벌러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 페렝 핀스 야외식탁에 앉아, 헝가리의 전통 음식 중 하나인 ‘후슐레베시 수프’(꿩고기 국수)를 먹을 때 가이드 율리아 퓔롭이 말했다.
“벌러톤 호수의 남쪽 연안은 평탄한 저지대로 주로 젊은층이 물가로 모여들고, 북쪽 연안은 전망 좋은 고지대가 많은데다 한적해 가족여행객이나 나이 든 이들이 많이 찾는다.” 티허니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조용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용한 마을’ 티허니의 고색창연한 골목엔 늘 여행객들이 붐빈다. 아담하고 예쁜 카페와 기념품점도 즐비하다. 여행객의 발길이 가장 몰리는 곳은 벌러톤 호수 풍경이 근사하게 펼쳐지는, 베네딕트 성당 옆 공원이다. 흰 돛을 올린 크고 작은 요트들이 자욱하게 깔린 광활한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성당은 18세기에 다시 지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다.
티허니 마을과 벌러톤 호수 물가를 따라 자전거를 빌려 타고 둘러볼 수도 있다.
올해는 한국-헝가리 수교 25주년인 해다.
베스프렘(헝가리)/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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