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18 10:25
수정 : 2016.08.18 14:29
사하촌 여인숙에서 생긴 일
|
욕실이 딸린 여인숙 객실도 적지 않다. 이병학 기자
|
사하촌이었다. 벌써 십여 년 전쯤, 남도의 산사 순례를 나선 길이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갈아타느라 종일 시달린 속이 쓰라렸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숙소를 먼저 정해둘 요량으로 절 아래 민박집을 둘러보는데, 한 집은 대문에 ‘동파’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그나마 겨우 동파를 면한 집은 세 개의 방이 모두 찼다. 아쉬운 대로 어딘가 괴기스러워 부러 못 본 척 지나쳤던 여관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좁고 긴 복도 양편으로 객실들이 들어서 있고, 몇 년을 빨지 않았는지 문밖에서도 이불 찌든 냄새가 새어나왔다. 문이 반쯤 열린 어느 객실 안에는 누런 담요에 화투장이 흩어져 있고, 곁에는 빈 맥주병들이 취해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지? 두리번거리는 순간, 마치 저 복도 끝에서 ‘여고 괴담’의 그 아이가 퉁, 퉁, 퉁 튀어나올 것 같아 몸서리를 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옆 여관도 별 차이는 없어 보였으나 일단 너무 허기가 졌고, 마침 건물 입구에 카운터가 보여 방을 물었더니 수상한 시선으로 나를 훑던 붉은 립스틱의 중년 여인은 없. 어. 요. 또렷하게 방이 없다고 말했다. 없다니…, 이 겨울에, 아! 순간 내가 곧 자살이라도 할 여자처럼 보였나 싶어 체념하고 돌아섰다. 나와 엇갈려 들어가던 남녀 한 쌍은 내가 그 앞 식당에서 비빔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에도 나오지 않았다.
여관들에서 거절당하고 결국 찾아 들어간 곳은 여인숙. 칠도 안한 시멘트 계단을 올라 이윽고 다다른 204호. 부실한 남자라도 세게 잡아 돌리면 한 번에 열어젖힐 것 같은 손잡이에 조심스레 열쇠를 꽂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현관문과 화장실 문, 방문은 모두 나무로 된 재질에 싱그러운 풀잎 같았을 연둣빛이 제 색의 운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공동화장실이 아닌 것에 감사하고 큰 창문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방범창도 없었다. 하지만 2층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사! 기도하는 마음으로 창문의 고리를 꼭 걸어잠그고 붉은색 커튼을 쳤다. 대부분 낡은 것들이긴 했지만, 비교적 깔끔한 편이었고, 웃는 얼굴에 친절하던 주인 여자를 떠올리며 안도해야만 했다.
|
천안 여인숙 골목. 사진 이병학 기자
|
창밖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뒤였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욕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욕실 쪽으로 한발 내딛는 순간, 미끄덩하며 내 몸은 중심을 잃고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동시에 몸에 둘렀던 타월도 풀어헤쳐졌다. 까딱하면 요 한 장 깔려 있지 않은 낡은 여인숙 방바닥에서 스물일곱의 젊은 여자가 알몸으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에구, 에구.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바닥을 살폈다. 아,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그것은, 허연 액체가 들어 있는 콘돔이었다. 한숨을 쉬었던가, 욕을 했던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서며 몸서리치는데, 주인 여자가 문밖까지 따라 나와 연신 사과를 해대는 바람에 일시 행인의 눈요기가 되기도 했다.
갑자기 술 한잔 벌컥 들이켜고 싶어지며 목이 바짝 말라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인숙을 찾아 나서야 했다. 나의 산사 여행 첫날은, 그렇게 기묘한 여인숙 탐방이 계속됐다.
산옥(연극배우)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