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2 20:04
수정 : 2017.08.02 20:13
[ESC] 커버스토리
그는 친절하게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아저씨, 추천작 없어요?” 쭈뼛거리며 묻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며 골라준 비디오테이프였다. 기회는 지금이다. 아무도 없는 거실의 비디오는 내 차지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내 심장은 쿵쾅거렸고, 살색 화면이 번쩍거리는 동안 내 낯빛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마침내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한국 에로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는 동안 당신 또한 이런 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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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극장에서 밀려난 에로영화는 비디오 시장을 공략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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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에로영화의 역사를 책으로 엮는다면, 맨 앞장에는 이 영화를 넣어야 한다. 1982년 개봉한 <애마부인>. 이 영화는 최초의 심야상영 영화이자 여성의 가슴이 스크린에 드러난 최초의 한국 영화이기도 하다. 비록 주인공이 나체로 말을 타는 모습을 멀리서 카메라로 담은 장면과 비에 젖은 옷을 통해 비치는 모습이긴 하지만, 한국 영화의 금기의 벽 하나를 깨뜨린 것은 분명하다.
도전은 이전에도 있었다. 최초로 키스 신이 등장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서였다. 여배우의 나체가 처음으로 등장한 영화는 유현목 감독의 <춘몽>(1965)인데, 이 때문에 감독은 벌금을 내야만 했다.
노출 수위의 한걸음 진보를 이루어낸 <애마부인>은 1980년대를 에로영화의 전성기로 이끌었다. 원미경의 대담한 연기가 돋보인 <반노>, 방희의 <빨간 앵두>가 연이어 개봉했고, <애마부인>을 통해 ‘1대 애마’로 불리던 안소영은 그해에만 <산딸기>, <탄야>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누렸다. 이미숙이 출연한 <뽕>(1985), 이대근의 과장된 연기가 인상 깊은 <변강쇠>(1986)는 신토불이 에로물로 자리잡으며 90년대 초까지 시리즈를 이어갔다. 이장호 감독이 연출하고 이보희가 열연한 <어우동>(1985)은 에로영화의 형식을 빌려 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런 에로영화의 열기는 <매춘>(1988), <파리 애마>(1988)의 연이은 흥행으로 정점에 오른다.
이런 에로영화들은 어쩌다 생겨난 걸까? 어떤 것도 이유없이 등장하는 법은 없다. 1970년대 들어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을 시작으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 변장호 감독의
(1978) 등이 연이어 흥행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급격한 산업화 시대에 가난이라는 굴레 때문에 육체의 순결을 잃고 호스티스로 전락하고 만다.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영화’로 불리던 이들 작품은 한국 영화에 에로티시즘이라는 영감을 서서히 불어넣는다.
한국 에로영화, <애마부인>이 시작
전두환정권의 ‘3S’ 정책 일환
서구 섹슈얼리티 영화 영향 반론도
흔히 1980년대 에로영화 전성기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의도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3S(영화·스포츠·섹스) 정책’을 꼽기도 한다. 야간 통행금지 해제를 포함한 몇 가지 유화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감각의 제국>(1976) 등 서구와 일본의 예술영화 감독들이 영화에 과감한 섹슈얼리티를 도입하는 실험들이 일어났고, 국내 영화계에서도 이런 시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라는 의견이다. 그동안 에로영화는 포르노그래피의 대체재라는 인식으로 다소 폄훼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적, 성적 금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면에서 그 의미를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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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 11>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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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에로영화는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가정에 비디오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급변의 시대를 맞는다. 극장에서 밀려난 에로영화는 ‘에로 비디오’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 비디오 시장을 매출 기반으로 삼는 에로 비디오의 탄생이다. 유호프로덕션과 한시네마타운 같은 전문 제작사들은 <야시장>, <성애의 여행>, <어쭈구리>, <정사수표> 등 적은 제작비와 기민함으로 물량 공세를 펼치며 호황을 맞는다. 1995년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엄청난 성공은 에로 비디오 황금기의 정점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1990년대 말 클릭엔터테인먼트, 씨네프로라는 경쟁사들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새로운 유행이 에로 비디오계를 휩쓰는데 바로 개봉영화들의 제목 패러디물이다. <나도 처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간첩 리철순>, <모텔 성인장>, <반지하의 제왕>, <목표는 형부다>처럼 기막힌 제목의 작품들이 화제에 오른 시기다.
1999년 37만명이던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2002년 1000만명 고지를 넘어섰다. 기술의 발달은 에로 비디오 시장을 피시(PC) 모니터로 옮겨버렸다. 대여가 아닌 다운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른바 ‘야동’이라고 불리는 영상물들이 불법으로 유통되면서 에로 비디오를 만들던 프로덕션들은 시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현재 ‘에로영화’라는 용어는 과거의 것으로 인식된다. 사실 정확하게 장르적 지위를 획득한 개념도 아니다.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한 영화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 단어의 정확한 유래도 알 수 없다. ‘성애영화’, ‘성인영화’, ‘19금 영화’ 등과 혼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에로영화의 지위는 ‘포르노그래피’처럼 직접적으로 성적 행위를 묘사하는 것은 배제하면서도 성을 주요한 소재로 삼아 대중이 이를 소비하는 영화 정도로 보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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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에로 비디오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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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영화 속 노출이 곧 외설이라는 인식을 깨려는 노력이 있었다. 검열 자체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영화의 금기는 대부분 무너졌고 영화 속 성적 표현은 더욱 솔직해지고 과감해졌다.
최근에는 극장 수익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얻더라도 ‘아이피티브이’(IPTV), ‘브이오디’(VOD) 서비스 등 부가판권 시장에서는 얼마든지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간신>(2015)은 극장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지만, 아이피티브이와 브이오디 서비스에서는 34만건의 관람 횟수를 기록하며 높은 매출을 올렸다. <완벽한 파트너>(2011), <전망 좋은 집>(2012)도 극장을 능가하는 수익을 벌어들였다.
부가판권 시장의 부활은 에로 비디오의 부활로도 이어졌다. 1990년대 말처럼 비슷비슷한 포맷의 저급한 작품을 지양하고 기획과 내용이 충실한 성인물을 제작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봉만대 감독의 <아티스트 봉만대>(2013), 공자관 감독의 <젊은 엄마>(2013) 등이 대표적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들어가던 극장, 그리고 까만 비닐봉지로 수줍게 감추었던 당신의 19금 욕망을 지금은 당신의 거실과 방에서,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에로영화가 건재한 이유다.
심규한(씨네플레이 에디터)
에로영화(Ero movie) 성적 욕망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의 영화. 성애 장면을 주로 다루지만 직접 성행위를 하지는 않음. 실제 성행위를 집중 묘사하는 포르노 영화와는 구별됨. ‘에로’는 에로틱을 줄인 일본어식 표현. 정확한 표현은 ‘에로틱 무비’(Erotic movie), ‘에로틱 필름’(Erotic film)이나 한국에선 ‘에로 영화’(Ero movie)로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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