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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9 09:08 수정 : 2019.12.29 10:32

칠순이 넘은 마리아(오른쪽)와 남편 살바도르는 커피녹병의 습격 등 시련에 굴하지 않고, 유기농 비료를 쓰고 자체 가공기를 만드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기부도 아끼지 않는 이들이 아랫마을을 지날 때면 아는 이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서필훈 제공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② 엘살바도르 ‘놈브레 데 디오스’의 마리아

10년째 직거래하는 ‘신의 이름’ 농장
4~5대째 이어가는 마리아와 가족들
이웃과 땅과 기쁨을 나누며 살아가
기후변화로 기승부리는 커피녹병
대처할 규모의 자본이 부족한
마리아 농장 등 소농들 더 위협해

수확량 떨어져도 도전 이어가는
마리아 농장의 단아한 커피맛

칠순이 넘은 마리아(오른쪽)와 남편 살바도르는 커피녹병의 습격 등 시련에 굴하지 않고, 유기농 비료를 쓰고 자체 가공기를 만드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기부도 아끼지 않는 이들이 아랫마을을 지날 때면 아는 이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서필훈 제공

나는 장사꾼이다. 품질 좋은 커피를 싸게 사서 팔아야 이문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오로지 커피뿐이다. 그래도 전 세계 커피 산지를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들을 통해 접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들이 있다. 그중 어떤 것은 정말 흥미롭고 인상적이어서 연이은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정작 사업 얘기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헤어져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종교와 신들에 대한 이야기다. 커피와 신이라니. 내가 거래하는 커피 생산자 중에는 힌두교 사제, 기독교 목사, 이슬람교와 가톨릭 신자, 냉담자, 무늬만 신자, 마르크스주의적 무신론자까지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성과 속, 초월과 경험, 차안과 피안, 삶과 죽음, 고통과 구원, 인간과 신에 대한 지혜를 탐닉한다. 그러다 잠시 장사꾼으로 돌아와 정신이 들면 ‘이 사람의 이야기 어느 즈음에 우리 사업과 커피와 내가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기르는 커피가 한편으로는 그들이 믿는 신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좋아한다.

미안해요, 마리아의 편지

내가 10년째 커피를 거래하고 있는 엘살바도르의 농장 이름은 ‘놈브레 데 디오스’(Nombre de Dios)다. 스페인어로 ‘신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커피 농장 이름치고는 꽤 특이해서 농장주 마리아에게 유래를 물었다. 농장 이름은 1900년대 초 엘살바도르 북서부 메타판 지역에 처음 커피를 심은 마리아의 증조할아버지, 사무엘 루나로부터 내려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커피 농장을 갖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사무엘은 다른 지역에 있는 커피 농장의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하며 돈을 모았고 마침내 이 산속에 자투리땅을 살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 커피를 기르는 곳이 없었고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사무엘의 땅이 춥고 토질이 적합하지 않아 커피를 키울 수 없다고 수군거렸다. 그때는 영농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커피나무를 심기 전에 토질을 분석해 볼 수도 없었고 기후 조건 등 많은 것들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아라비카커피나무는 오늘날에도 기르기가 매우 까다롭다. 적정 위도, 기온, 강수량, 강수 시기, 건기 길이, 일조량, 고도, 습도, 토질 등이 모두 맞아야 잘 자라고 상품성 있는 커피 품질과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다. 사무엘은 이렇게 예민한 커피나무가 땅에 잘 뿌리내릴 수 있을지 걱정했고, 주변 사람들 말처럼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그는 커피나무를 한 그루 심을 때마다 “신의 이름으로”(En el nombre de Dios)라고 축복하며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했다.

사무엘이 정성 들여 심은 커피나무들은 다행히 잘 뿌리내렸고 이후 어엿한 농장을 이뤘다.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살바도르는 4대째, 그녀의 아들 하비에르는 어머니를 도와 5대째 이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비에르는 중남미에서 농경학 분야로 이름 높은 온두라스 사모라노농업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세계 스페셜티 커피업계에서 요구하는 고품질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품종과 가공 방식을 계속 실험하고 있다. 이런 열정으로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은 지금까지 여러 번에 걸쳐 ‘컵 오브 엑설런스’(Cup of Excellence·매년 해당 국가 최고의 커피를 뽑는 국제대회) 커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7년 전인 2012년, 엘살바도르에는 40년 만의 폭우가 쏟아졌고 전체 커피 생산량의 40%를 잃었다. 나는 소식을 듣고 바로 마리아에게 메일을 보냈다. 마리아는 농장이 위치한 메타판 지역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인데도 많은 비 피해가 있었고 자신의 커피 인생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몹시 속상해했다.

수확이 끝난 뒤 마리아한테 샘플을 받아 커피를 시음해 보니 우려했던 대로 품질이 썩 좋지 않았다. 커피는 농작물이고 사람의 힘은 자연 앞에서 여전히 초라하기만 하다. 마리아는 몹시 어렵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내며 커피 가격에 관해 이야기했다. 품질이 작년만 못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지만, 작년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좋은 품질의 커피가 희소한 상황이라 엘살바도르 전역에서 스페셜티 커피 가격이 높게 형성되었고 농장 수확량이 너무 적다 보니, 자신에게 커피 밭을 담보로 돈을 융통해준 커피 가공소에서 작년보다 높은 판매 가격을 구매자에게 받아야 해당 연도 대출금 상환이 가능하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나는 바로 답 메일을 보내지 못했다. 가격 협상을 좀 해봐야 할지, 혹은 다른 농장 커피를 찾아봐야 할지 생각이 많았다. 다음 날, 고민 끝에 나는 이런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나의 친구 마리아, 당신이 제시한 가격보다 5% 더 높은 가격을 드릴게요. 적은 액수일지라도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의 수해 복구와 함께 일하는 이웃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내년 더 멋진 커피를 만나게 해주세요. 신의 이름으로.”

하비에르는 어머니 마리아를 도와 5대째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고품질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가 낡은 부품으로 만든 커피 가공 기계 옆에 서 있다. 서필훈 제공

얼기설기 로봇 같은 가공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에 더 큰 난관이 닥쳤다. 곰팡이가 옮기는 커피녹병이 엘살바도르 전역을 휩쓸었다. 이 병에 유난히 취약한 부르봉 품종을 기르던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은 피해가 막심해 수확량이 5분의 1로 줄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인데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병에 걸려 이파리가 모두 떨어지고 가지가 상한 커피나무는 새 가지와 이파리가 충분히 돋아나 광합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2년 동안 열매가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1년에 3~4번 정도 약을 치면 충분했던 병충해 구제가 7~8번을 쳐도 커피녹병을 완벽하게 몰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만큼 커피녹병이 강해졌고 인근 커피 농장들에서 더 이상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커피 농사를 포기하면 그곳에서 창궐하던 커피녹병 곰팡이가 끊임없이 바람을 타고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원래 다른 지역에 커피 농장 하나를 더 갖고 있었는데 커피녹병 때문에 커피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어 대출금을 갚지 못했고 결국 농장을 잃었다. 많은 구매자가 어쩔 수 없이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을 떠나갔고 나만 홀로 남았다.

커피녹병은 원래 대부분의 커피 농장에서 늘 작은 말썽을 부리다가 건기가 시작되면 사라지는, 감기처럼 그리 대단치 않은 곰팡이병이었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기온이 올라가고 우기와 건기의 균형이 깨지면서 커피녹병을 일으키는 곰팡이들은 더 강해졌고 더 오래 기승을 부렸으며 내성이 생겨 기존의 약이 더는 듣지 않았다. 추운 곳에서 활동을 못 하던 곰팡이는 따듯해진 기온 탓에 고도가 높은 커피 농장까지 올라왔고 무방비였던 농장들은 절멸했다.

중미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커피녹병은 중미에서만 70%의 농장들을 감염시켰고 32억달러(약 3조7천억원)의 손해를 끼치며 170만개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국제열대농업센터(CIAT)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커피를 재배하고 있는 지역의 50%가 2050년까지 커피 재배지로 부적합해진다. 아직 먼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벌써 기후 변화는 많은 커피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소농은 자금력과 대처 능력이 뛰어난 대농장에 비해 기후 변화에 훨씬 더 취약하다. 왜냐하면, 커피녹병은 영양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 면역력이 떨어진 나무, 가지치기로 정기적인 수령 관리를 받지 못한 노령의 나무, 커피녹병 발생 초기에 적절한 구제를 받지 못한 나무에 더 큰 타격을 준다. 하지만 가난해서 비료나 퇴비를 구비하지 못하고, 당장 수입이 줄어들까 봐 가지치기를 하지 못해 수령 많은 나무를 그대로 두고, 커피녹병을 발견해도 약 칠 돈이 없어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소농이기 때문이다. 많은 소농은 기후 변화에 따른 심각한 병충해와 수확량 감소, 국제 커피 시세 하락에 허덕이고 있다.

나는 작년에 수확이 모두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을 다시 찾았다. 마리아는 농장 노동자들을 위해 작지만 경작할 땅을 나누어 주었고 산 아랫마을에는 의료시설, 축구장, 교회, 학교 설립을 위해 토지를 기부했다. 그녀는 이웃을 돕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한다. 마리아와 차를 타고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사는 집을 지날 때면 아이들과 부모가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마리아가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따듯한 말을 건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이 무척이나 따듯해지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수확이나 가공, 로스팅이나 추출 이외에 우리가 손님들에게 건네는 커피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과정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올해 수확한 커피를 함께 시음했다. 요즘 스페셜티 커피 구매자들이 좋아하는 풍부한 산미, 꽃향기, 과즙 같은 향미는 부족했지만, 무척 달콤했고 잘 익은 오렌지향, 매끄러운 촉감, 긴 여운이 좋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커피가 보여주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엘살바도르 커피다운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 커피 맛이 무척 좋다는 말에 마리아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었다.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은 커피녹병 이후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매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비싸고 토질을 떨어뜨리는 화학비료 대신 일본의 유기농 비료와 천연 농약 제조법을 연구해 지금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완전히 대체했다. 대형 커피 가공소의 불안정한 품질 관리와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 가족은 수십년 동안 거래하던 관계를 끊고 과감히 자체 가공소를 농장 한쪽에 만들었다. 유명 회사의 멋지고 반짝반짝한 설비가 아니라 오래되고 낡은 각종 기계와 부품을 모아 얼기설기 조합해 만들어 마치 괴물 로봇같이 생겼다. 하비에르가 손수 제작하다 보니 아직도 마무리해야 할 것이 많다며 겸연쩍어했지만, 올해부터는 내가 사는 커피를 제대로 가공해 주겠다는 그의 말에 자못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 노동자들이 커피를 포대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농장주 마리아 가족은 농장 노동자들에게 작지만 경작할 땅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서필훈 제공

그들의 농장은 이미 사원

농장과 커피 가공소를 둘러보고 오두막 앞 소나무 그늘에 다 같이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다. 마리아와 살바도르, 하비에르 그리고 나. 이제 칠순이 넘은 마리아와 살바도르에게 인생의 지혜 따위를 물어볼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마리아와 살바도르를 10년간 옆에서 지켜봤으면서 무엇을 새삼 묻나 싶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시간으로만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다.

120년 전 사무엘이 기도하며 심었던 커피나무, 마리아와 하비에르가 함께 커피녹병을 앓았던 커피나무는 그들이 쌓아 올린 탑이고 그들의 농장은 이미 사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고통 너머 희망을 보고, 궁핍한 가운데 이웃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신의 섭리인 걸까, 인간의 얼굴을 한 작은 신들인 걸까. 사실은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의 커피가 더 맛있어지고 수확량도 많아져 잘 팔렸으면 좋겠다고 주로 생각한다. 놈브레 데 디오스 농장은 아직도 예전 수확량의 3분의 1밖에 회복하지 못했지만 매년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나의 가장 오랜 다이렉트 트레이드 농장, Nombre de Dios. 다시 한번, 신의 이름으로.

▶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구매 일을 담당하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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