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마 논술 주제별로 풀어보는 기출문제
제1강 최대한 올바르게 보기-인식론제2강 부조리한 운명 속의 삶-삶의 조건
제3강 모두의 자유로 이루는 평등-개인과 사회
제4강 생명과 더불어 가는 과학-과학과 생태
제5강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위한 지식인 상 인식론은 논술 문제의 전부다 인식론과 관련한 문제는 최근 가장 많이 출제되는 문제 유형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 출제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것이 논술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이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인식론은 논술 문제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논술 자체가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을 묻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것에 최고로 집중해야 합니다. 이 유형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아는 것은 사실인가, 해석인가?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할 때는 보통 객관적 사실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100℃에서 끓는다’든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게 그 예죠. 그러나 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실제로 100℃에서 끓는 물은 없습니다. 설악산 꼭대기에서 끓인 물과 집에서 끓인 물의 끓는점은 다르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도, 지구라는 조건에서만 그렇죠.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객관이란 약속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앎은 ‘해석’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만약 우리의 인식이 해석일 따름이라는 주장을 지지하게 되면, 이제 갖가지 주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해석은 도대체 누구의 관점에서 나온 것인가라고 따지게 되죠. 이 질문은 ‘그 해석에 따를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로 이어집니다. 예로써 역사 해석을 봅시다. 똑같은 역사적 사실도 지배계급이 볼 때와 대중이 볼 때는 해석이 달라집니다. 조선사에서 위대한 여성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도, 남성의 관점인가, 여성의 관점인가에 따라 주인공이 바뀔 겁니다. 이건 새만금 간척사업 같은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문제에 ‘자연이나 후손에게는 무엇이 더 유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전혀 다른 대답을 듣겠죠. ※관련 문제: 서울대 2004학년도 수시(인문), 고려대 1999·2004학년도 정시, 연세대 2002·2003학년도 정시(인문).
2. 경험을 통한 인식은 믿을 만한가? 우리는 보통 경험을 통해서 사실을 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떠올리면 쉽게 해명됩니다. 어린아이가 직접 사물을 대하거나, 그림책을 보면서 저절로 어떤 사물을 인식하지는 않죠? 누군가가 가르쳐준 이름으로 인식하죠? 바로 이겁니다. 백지 상태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준 이름[언어]을 근거로 익히죠. 이미 주어진 것을 통해서 안다는 겁니다.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용’은 현실에 없는 건데도, 우리는 용을 압니다. 어떻게 경험도 하지 않고 알 수 있을까요? 가만히 용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사슴의 뿔에 뱀의 비늘, 독수리 발톱, 말의 갈퀴 따위가 묘하게 합쳐진 꼴이죠? 그렇다면 ‘용’은 이미 주어진 앎을 근거로 짜 맞춘 동물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까지 듣고 꽤 똑똑한 친구들은 ‘아하, 지적재산권이란 것도 달리 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전적으로 자기 창작물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사실 90% 이상은 이미 주어진 겁니다. 새로운 해석의 독창성을 인정하더라도, 그 비중이 그렇게까지 높은 건 아니죠. ※관련 문제: 서울대 2005학년도 정시. 3. 이성[합리]주의는 올바른 인식을 보장하는가? 이것은 근대의 인식론, 즉 합리주의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합리주의적 인식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계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근대 이전까지는 그저 논리적으로 설명할 뿐 세계를 계산하지는 못했습니다. 가령 ‘비가 내리는 이유는?’이라는 질문에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식이죠. 이건, 말은 되지만, 검증이 안 됩니다. 더욱이 이걸로는 실제 삶에 별 도움도 되지 않아요. ‘생명을 키우려고 비가 내린다’는 걸 알든 모르든 비는 오락가락할 것이고, 우리 삶은 변덕스런 비에 얽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인식은 우리가 비를 제대로 예측할 수도, 따라서 통제할 수도 없는 허술한 인식입니다. 그러던 것이 합리주의적 인식, 즉 사물 운동의 원인을 파악하여 그것을 근거로 전체를 법칙으로 설명하는 데 이르면, 이제 세계는 계산이 됩니다. 바로 ‘과학법칙’이죠. 가령 ‘F=ma’ 같은 공식은 얼마나 멋집니까! 그것만 알면 ‘m’이 무엇이건 간에 몽땅 설명이 되죠. 이 효과는 실로 컸습니다. 덕분에 자신 있게 세계와 인간을 개조하겠다고 덤벼들 수 있었으니까요. 그 결과 이만한 풍요를 누리고 있죠. 그런데 그 결과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죠? 수많은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합리적 이성과 그에 입각한 과학적 인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세계의 존재 방식’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의문으로 펼쳐집니다. 세계가 애당초 계산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던가? 이성이란 건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죠. 특히 이성의 한계와 관련해서는, 이성을 세계 개조와 물질적 풍요의 도구로만 사용한 ‘도구적 이성관’이 도마에 오릅니다. 그러면 그것을 대체할 바람직한 이성은 뭘까요? ※관련 문제: 연세대 1999학년도 정시(자연), 서울대 2004학년도 모의문항 2, 고려대 2003학년도 정시. 세계와 나의 관계를 떠올려라 그럼 어떻게 이 문제에 접근할까요? 워낙 방대해서 그만큼 방대한 독서량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인간 인식의 구조를 이해하면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말이 좀 어렵죠? 사람이 세상을 인식한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사람이 세상과 만난다는 겁니다. 몸으로도 만나지만 머리로도 만나죠. 이 만남의 방식을 이해하자는 겁니다. 그러려면 먼저 사람이 처한 조건과 인식 대상이 처한 조건을 따져봐야죠. 그런데 이 둘이 처한 조건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저 혼자 사는 건 아니죠? 무수한 사람, 무수한 사물들과 더불어 살잖아요. 마찬가지로 인식 대상도 저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한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이처럼 무한대의 관계가 낳을 결과는 뭘까요? 사과와 나의 만남을 떠올려 볼까요? 사과가 이빨과 만나면서 잘게 으깨지죠. 그것은 또 식도를 만나 위장으로 넘어가고, 위장과 만나 녹아서 혈관 속으로 양분을 공급하고, 그 찌꺼기는 항문과 만나 ‘똥’으로 변하죠. 그건 또 땅과 만나 거름이 되어 다시 사과가 될지도 모를 일이고요. 어떤 일이 생겼나요? 그렇죠! 무한관계는 ‘무한변화’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 무한관계란 게 정말 무한하거든요. 배가 고플 때 ‘사과’란 말을 들으면 입에 침이 고이죠. 이때 사과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텔 아시죠? 그가 아들 머리 위에 얹힌 사과를 보면서 침을 질질 흘린다면, 그건 아비도 아니죠?^^ 그때 사과는 ‘생사의 기로’쯤 되겠죠. 배가 엄청 부를 때 ‘사과 한 개 더 먹어!’란 명령을 받았다면, 그때 사과는 ‘벌칙’이겠구요. 이쯤 해서 결론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무한관계 속에서 무한변화하는 것들끼리의 만남’이다! 이처럼 모든 인식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늘 바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래서 인간의 인식이란 게 어려우면서 오묘한 겁니다. 그러나 일단 ‘무한관계→무한변화’라는 이치를 떠올리면 아주 많은 게 이해가 됩니다. 걸치지 않은 영역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식론은 논술 문제의 전부’라고 한 겁니다. 논술은 삶이다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인식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은 ‘무엇이 잘못된 인식인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뭐죠? 그렇죠! 무한관계에서 무한변화하는 것을 무시한 인식이죠. 달랑 하나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 걸 갖고 마치 전부 다 안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일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게 모든 관계와 모든 변화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거든요. ‘무한관계→무한변화’를 떠올리면, 인간의 인식은 원천적으로는 ‘무지’ 상태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식을 멈출 순 없는 노릇! 여기서 마지막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인간은 왜 인식을 하려고 하는가?’ 그야, 제대로 알아서 삶에 도움을 얻으려고 그러는 거죠. 그렇다면 가장 올바른 인식은 그런 도움을 주는 인식일 겁니다. 따라서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자기가 놓인 상황과 자기 인식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관건이겠죠?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나와 우리가 놓인 상황을 제대로 보려는 통찰력과 나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 즉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모쪼록 나와 이웃이, 우리 민족과 인류가 놓인 현실을 떠올리길, 그 속에서 나와 우리가, 나아가 우리 후손까지, 가져야 할 바람직한 가치관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러노라면, 인식론뿐만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보일 겁니다. 주어진 제시문도 이해될 겁니다. 이래서 인식은, 논술은 나와 우리의 삶입니다. 우한기/일이관지 논술연구모임 대표 ilgwan.net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