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마 논술 <주제별로 풀어보는 기출문제>
2. 모두의 자유로 이루는 평등-개인과 사회
자유와 평등, 영원한 대립?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합쳐놓은 거죠. 자유주의는 ‘자유’를, 민주주의는 ‘평등’을 궁극적 목표로 삼죠. 그런데요, 이 둘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붙어도 괜찮은 관계일까요? 혹시 ‘부적절한 관계’는 아닐까요?^^
자유주의는 로크의 자연권에서 비롯합니다. 자연권이란, 자연에 있는 철의 법칙처럼, 실정법으로는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인간 권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 이렇게 셋입니다. 그런데 이 세 권리 중, 나머지 권리를 좌우하는 권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재산권입니다. 돈 있는 놈이 시키면 없는 놈은 별 수 없이 자유를 포기하고 목숨 걸고 일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게 자유주의의 자유입니다.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의 자유죠. 이래서 등장한 게 ‘자유방임주의’입니다. 재산권 행사의 자유를 방임하는 거죠. 결국 이것은 ‘자유경쟁자본주의’를 떠받드는 정치이념이라 하겠습니다. ‘자유주의에는 자유가 없다!’
이 자유주의의 결과 독점이 나타나는데, 결국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진다는 거죠. 이에 저항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평등을 제창합니다. 이 두 이념은 격렬하게 맞붙습니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다수 인민이 주권자’라는 건데, 자유주의는 소수를 떠받들잖아요. 그러니 붙을 수밖에요.
끝까지 가면 자유주의가 손해예요.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야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요. 때마침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위협합니다. 이대로는 큰일나겠다 싶었던 자유주의가 타협책을 제시합니다. 우선 경제적 평등은 ‘복지국가’의 이념으로 해결합니다. 그것은 가진 자의 ‘자발적 베풂’을 근거로 삼습니다. 정치적 평등은 ‘1인 1표제’로 해결합니다. 이로써 모든 인민이 주권자라는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실현된 거죠. 그러나 이미 이것은 왜곡된 자유, 왜곡된 평등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제들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 개인주의와 그 한계 자유와 평등은 둘 다 개인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합니다. 자유야 그렇다 하더라도, 평등은 왜 그럴까요? 평등은 모든 개인이 대등하게 살자는 거죠? 이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당연히 신분적 예속에서 해방된 개인이 등장했기 때문이죠. 이래서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등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개인주의’라 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게 나쁜 거죠? 별 근거가 없어요. 그런데 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처럼 들리냐는 겁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즉 시장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건 반드시 익혀 둬야 합니다.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개인주의가 시장과 만나면서 ‘이기주의’와 ‘개인의 소외’ 현상이 일어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개인주의에서 개인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지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 개인들이 살아가는 곳은 시장입니다. 당연히 시장에서 살아남는 게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겠죠?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장의 논리에 충실해야죠. 그런데 시장이란 게 결국 배타적 무한경쟁의 장이거든요. 여기서 이기주의나 인간 소외 같은 게 생기는 겁니다. 바로 우리 얘기죠. ※관련 문제로는 서울대 제3회 경시, 연세대 2000학년도 정시(인문), 이화여대 2003학년도 정시, 한양대 2001학년도 정시가 있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으로는 고려대 2000학년도 정시, 2005학년도 정시가 있습니다. (2) 자유와 책임(자유의 기준과 한계)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듣습니다. 하도 많이 쓰다 보니 아주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만, 사실 이건 심각한 문제죠. 자기 선택이 낳을 결과에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리 쉽게 자유를 선택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말이죠, 이 책임이란 게 없으면 사실은 자유도 없습니다. 노예를 보세요. 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책임이 없죠. 반대로 어떤 결과가 생기더라도 내가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에는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그런데 누가 책임질까요? 우선은 자기가 집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이란 게 어울려 사는 존재란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만 책임지고 마는 경우는 드뭅니다. 항상 어느 누군가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령, 독립운동에 뛰어든 투사를 상상해 봅시다. 그 선택 때문에 겪는 고초를 자기만 책임지면 간단하겠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죠. 가족이나 이웃까지 고초를 겪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막연하기 짝이 없는 조국이니 정의니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 구체적인 가족들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 난감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투사는 어쨌든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니까요. 그 결과 나라가 더 오래 종속되고, 그 때문에 자기가 농사지은 걸 일제에 속수무책으로 빼앗기고, 그 때문에 아이가 굶주린다면, 이 결과도 책임져야 합니다. 결국 인간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람직한 선택일까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문제를 낳은 원인인, ‘나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를 곰곰이 되씹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가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포들과도 함께 존재한다는 거죠. 결국 선택은 ‘관계의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결국 자유의 한계와 연결됩니다. 우리 자유의 조건이 ‘관계 속 자유’라면, 이 ‘관계’야말로 자유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입니다. 만약 그 관계를 뿌리친다면, 그것은 자유의 전제 자체를 무시하는 꼴이 될 겁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순간, 자유는 배타적 자유가 되고 맙니다. 그 출발점과 한계를 인정하는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는 가능합니다. ※관련 문제로는 서강대 2004학년도 정시와 2004학년도 모의논술 2가 있습니다. 참 좋은 문제예요. (3) 자유와 평등 자유와 평등 중 어느 하나도 버리기 참 난감합니다. 이래서 둘의 충돌은 늘 문제가 됩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설명들이 타협으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먼저, 이 두 개념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부터 따져야 합니다. 평등을 침해하는 자유라면, 이 자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거꾸로 자유를 침해하는 평등이라면 이것에도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유만을 강조할 때 그것은 배타적 자유가 되어 평등을 침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결과가 같아야 한다는 식의 평등이라면 그것은 자유를 침해합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자유, 바람직한 평등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왜곡된 자유와 평등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현실입니다. 한번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의 출발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관계’라 했죠? 뭔가 해결책이 나올 것입니다. ※관련 문제로는 서울대 2002년 제3회 경시와 고려대 2004학년도 수시1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출발점을 떠올리자 저는 줄곧 ‘출발점’을 강조했습니다. 그게 뭐랬죠? 네, 바로 ‘관계’입니다. 여기서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결국 ‘바람직한 관계’와 연관된 문제라는 거죠. 무엇이 바람직한 관계일까요? 모두가 똑같다면 그게 과연 바람직할까요? 아니겠죠. 저마다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 덕분에 서로가 도움을 얻을 수 있어야겠죠. 이걸 자유와 평등에 적용해 보자는 겁니다. 자유가 문제되는 것은 관계를 무시할 때입니다. 자기 자유를 위해 훨씬 많은 자유를 희생시키는 거죠. 대신 관계를 존중하고 관계에 충실한 자유는 타인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라면,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더 큰 관계를 염두에 둔 선택을 할 것입니다. 결국 그의 자유는 ‘있어야 할 관계’를 위해 나머지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등이 문제되는 것은 차이의 공존과 어울림을 무시할 때입니다. 각자가 서로 다른 재능과 자질을 타고 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죠. 그런데 이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어떤 사회질서가 모두에게 같은 가치관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평등을 해치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한 평등은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 즉 차이들이 대등하게 어울리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이 자유와 평등은 동시에 왜곡되어 있습니다. 시장의 신, 물신의 은총을 받는 자만이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발상은 개인을 이기주의자로 내몰고 있습니다. 여기선 성공하나 실패하나 다 시장의 노예이긴 마찬가집니다. 이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한 자유인을 만나기 힘듭니다. 이렇게 왜곡된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짓밟는 거죠. 바람직한 관계 대신 소외된 관계가 나오는 거죠. 평등도 시장 때문에 왜곡되긴 마찬가집니다. 모두 똑같은 가치관에 젖어 남과 물질적인 균형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게 개성의 말살과 관계의 파괴를 낳는 거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아니, 진정한 자유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등할 수 있습니다. 평등한 자유, 자유로운 평등은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보입니다. 자연스러운 관계를 깨뜨리는 실체를 깨달아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런 삶의 추구 과정이 우리를 평등한 자유인, 자유로운 평등인이 되게 할 겁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 최소한의 물질을 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평등한 자유를 봉쇄당하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이래서 이 문제는 복지나 제대로 된 정치 따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한기/ 일이관지 논술연구모임(ilgwan.net) 대표
서울 강남청솔학원, 부산해운대청솔학원, 광주플라톤아카데미 출강중
저서 <우한기 논술 25강> (2004, 이슈투데이), <대한민국 대표 논술> (근간,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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