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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18 16:16 수정 : 2006.01.18 15:34

우한기/일이관지 논술연구모임(ilgwan.net) 대표, 서울강남청솔학원·부산해운대청솔학원·광주플라톤아카데미 출강중, 저서:<우한기 논술25강>(2004, 이슈투데이), <대한민국 대표 논술>(2005, 사회평론)

꼼짝마 논술 주제별로 풀어보는 기출문제

1. 최대한 올바르게 보기-인식론

2. 모두의 자유로 이루는 평등-개인과 사회

3. 생명과 더불어 가는 과학-과학과 생태

4.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5.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위한 지식인 상

세계화 속의 민족과 국가

우리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을 아주 크게, 아주 신비롭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이것과 관계 있는 문제는 그리 자주 출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추세에서 국가나 민족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요구는 현실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까지나 이 문제를 ‘성역’으로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와 민족이 되기 위해서도, 이 문제는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큰 덩어리로 다가오는 국가나 민족을 잘게 쪼개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각각의 문제를 추적하여 해결함으로써 바람직한 국가, 나아가 바람직한 세계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와 연관하여 출제된 기출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 역사상 진행된 대량 학살은 모두 ‘이름’ 아래 진행되었다. ‘이름’이 학살을 정당화한다. 신, 민족, 국가, 인민…. 총탄이 향하는 대상은 부정의이며, 그 반대는 정의의 ‘이름’이 들어선다. 그러나 ‘이름’ 아래 자행된 학살과 폭력 자체가 ‘부정의’의 ‘이름’이 아닐까.

(1) 국가 통치의 정당화 근거

국가는 ‘통치’의 개념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다른 단위와 달리, 국가의 통치행위 자체는 별로 문제로 삼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이라크 침공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당연하게, 나아가 숭고하게까지 받아들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이 당연한 것에 좀 도발을 하겠습니다.

국가의 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거래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른바 ‘give & take’죠. 대표적인 게 맹자의 ‘왕도정치’입니다. 왕이 선정을 베풀면 백성도 납세와 군역으로 봉사한다는 거죠. 이것을 ‘민본정치’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여기에는 ‘주고받기’ 내지 ‘계약관계’ 같은 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이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면 금세 드러납니다. 맹자의 ‘역성혁명’이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잘 됩니다. 우리가 국가의 통치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국가의 일방적 지배가 아니라, 뭔가 얻는 게 있기 때문이겠죠.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나 국가를 위한 자발적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은 물론 남의 목숨까지도 바친단 말이거든요. 이를 설명하는 것이 ‘신비화’ 논리입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민교육헌장’ 같은 데 보면 잘 나타납니다. ‘반만년 역사’니, ‘금수강산’이니 하는 것에서도 신비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나 민족은 ‘자연의 영원함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국가(민족)’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나라의 번영이 내 발전의 근거’라는 논리가 작용합니다. 나라가 내 생존의 근본 단위라는 논리죠. 이 논리도, 따져 보면, 꽤 많은 문제를 가집니다. 왜 거꾸로의 논리, 즉 ‘내 발전이 나라 번영의 근거’라는 논리보다 이 논리가 우세할까요? 이것은 나라가 우리의 삶을 ‘배치’한 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민등록을 합니다. 자라면서는 공교육에 이리저리 배치되죠. 지금은 좋은 대학에 배치되려고 발버둥치고 있고요. 이렇게 행정구역으로, 공무원으로, 납세자로 배치되었다가, 죽을 땐 한 평짜리 공동묘지에 배치됩니다. 이 모든 배치를 국가가 통계적(statistic=state+istic, 즉 통치학)으로 관리하죠. 이 배치의 주도권을 국가가 장악한 상태에서는 모두가 잘 배치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이것이 ‘나라 우선’의 논리로 드러난다 할 수 있겠습니다.

※관련 문제: 이화여대 2001학년도 정시, 서강대 2004학년도 1차 모의논술.

(2)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부적절한 만남

오늘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국가 운영이나 인재 양성의 목적도 세계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가 모두 이어져 하나가 된다는 세계화인데도 분쟁과 갈등이 끊일 새 없습니다. 게다가 약소국의 언어와 문화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출 문제에서는 주로 이 문제를 냈습니다.

이것은 세계화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한마디로 ‘시장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걸 핵심 구호로 내세우는 것만 보더라도 이 세계화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돈 안 되는’ 문화나 언어는 걷어치우고, ‘돈 되는’ 문화나 언어만을 추종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참 논란이 되었던 ‘영어공용어론’도 바로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세계 전체를 약육강식의 장으로 내몹니다. 언제나 ‘획일화’는 ‘위계화’를 부르는데, 지금의 세계화도 예외가 아니죠. 이러다보니 모든 나라의 가치는 ‘국익 우선’으로 치닫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광풍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황우석 논쟁’도 마찬가지죠. 이처럼 지금의 세계화는 수많은 사람을 ‘민족주의자’로 만듭니다. 특히 미국이나 중국의 민족주의적 경향은 패권주의라 할 만합니다.

이런 민족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합니다. 대외적인 배타성과 대내적인 획일성이죠. 한마디로 ‘다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마다 ‘국익’을 내세우지만, 사실 이것은 국익을 해치는 지름길입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어울려 토론하고 소통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민족주의를 우려하지만, 우리의 민족주의도 못지않습니다.

오늘의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정반대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동일한 토대를 갖습니다. 그 둘은 시장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국익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삼성’의 부패를 파헤치는 것도 ‘매국적 행위’가 돼버립니다. 이것은 완벽한 자본주의적 민족이 되어 타국 위에 군림하자는 발상,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의 비민주적이고 반인간적인 세계화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이것이 국가권력도 시장의 논리에 편승할 줄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련 문제: 부산대 2002학년도 정시, 성균관대 2003학년도 정시.

(3) 바람직한 세계화를 위한 국가관

바람직한 세계화는 서로 다른 문화와 사상들이 대등하게 어울리는 겁니다. 그렇게 각 민족의 다양성이 소통할 때 세계인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학문·인권·생태와 같은 수많은 가치들을 대등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정부나 기업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가 세계화의 주체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제와 주체의 다변화’죠. 이를 위해서도 경제 일색인 세계화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다양한 가치를 대등하게 높이는 길을 찾아야겠죠.

바람직한 세계화는 ‘다양성의 공존으로 이루는 융합’입니다. 최근 ‘문화다양성 협정’은 이런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 ‘차이’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문화와 학문을 현대화하여 세계로 들고 나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양성을 위해서도 먼저 차이를 마련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차이들이 네트워크화하여 세계시민사회를 이을 수 있다면, 바람직한 세계화가 그저 꿈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원대한 그림 속에서 그려보는 국가와 민족의 상이야말로 바람직한 국가관, 민족관이 될 것입니다.

※관련 문제: 고려대 2000·2005학년도 정시.

민족을 해치는 민족주의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세계 시민사회의 소통을 위해 물리쳐야 할 낡은 이데올로기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이미 시장의 논리가 철저하게 장악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언제까지 허울뿐인 이념을 차지하려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여야 한단 말입니까.

위대한 민족은 ‘남 위에 군림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이 왜곡된 민족상이 인류를 늘 분쟁과 갈등으로 내몰았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민족은 ‘포용하고 소통할 줄 아는 민족’입니다. 이건 개인도 마찬가지죠. 따라서 우리가 확보해야 할 민족상은 각자가 자기 삶을 살고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구성원들로 충만한 사회, 건강한 시민사회를 형성할 줄 아는 민족상입니다. 이것은 고정된 민족상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인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만들어가는 민족상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영원한 이상인 ‘자유로운 개성인들의 공동체’ 아닌가 말이죠. 그런 독특함으로 세계로 나아가는 민족의 미래를 그려 봅니다.

민주주의로 세계화를!

대안은 민주주의입니다. 이때 민주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민주’, 즉 ‘인민주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달리하자면 시민의 참여로 만드는 정치권력, 즉 ‘시민주체민주주의’죠. 이것은 그저 다수의 지지만 받으면 권력을 쥐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각 분야에서 각각의 시민 주체들이 스스로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입니다. 시민의 수평적 연대, 즉 네트워크로 만드는 권력입니다. 이를테면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시민 공동체가 소통하고 합의하여 만들어가는 나라죠.

이 일국적 차원의 참여민주주의가 세계적 차원의 시민 권력을 창출할 원동력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국적 민주주의→세계적 민주주의’라는 도식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화 과정이 세계적 차원의 네트워크화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국가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차원에서 펼치는 ‘다차원적인 민주적 행동’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이 여러분의 삶의 과정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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