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12.25 19:24 수정 : 2006.01.18 15:30

서구문명은 ‘강자 중심의 논리’ 개방성 회복이 대안의 첫걸음

2006년 논구술·입시정보 특집 ‘꼼짝마 논술’

주제별로 풀어보는 기출문제/문명의 한계와 지식인의 과제

현대 문명이라 하면, 자본주의·합리주의·과학주의·자유주의 등으로 불리는 갖가지 이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것들 하나하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습니다. 이제 이 모든 현대 문명의 흐름을 꿰뚫는 원리를 알아보면서,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야겠습니다.

현대 문명이라 하면 흔히들 ‘서구 문명’을 일컫습니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모든 문제를 그냥 서구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단정하는 것은 좀 문제가 많습니다. 서구 문명 중에서도 우리가 살려야 할 긍정적인 점이 많을 뿐더러, 막연히 그렇게만 문제를 진단하면 ‘그래서 동양이 대안’이라는 식의 단편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동양 사상이나 동양 문명은 이미 한 번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했다는 것은 그 나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죠. 따라서 무작정 동양 사상을 대안으로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서로 만나 함께 해결해야겠죠.

중요한 것은, 만나되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현대 문명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서구 문명이 다른 문명을 대하는 태도가 개방적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결국 문제의 핵심은 현대 문명의 폐쇄성과 배타성인 것이고, 이것을 낳은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문명은 적어도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지식인상도 바로 이런 문제의 해결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가 나옵니다. 참고로, 이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문제로는 서울대 2005학년도 수시 문제가 있습니다.

(1) 서구 문명 비판

서구 문명은 ‘이성적 인간’의 발견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입니다. 이 명제는 ‘생각하는 나’, 즉 이성적 인간을 모범 답안으로 제시합니다. 이성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무기 삼아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이제 인간은 세계를 ‘인간을 위한 세계’로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립한 것이 바로 ‘과학기술문명’입니다. 과학기술문명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발상과 직결됩니다. ‘과학’으로 세계를 알아서 ‘기술’로 세계를 정복하자는 거죠.

이성적 인간이 세계를 연구하여 개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다른 말로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를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발상이죠. 이것은 상황에 따라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 ‘비서구에 대한 서구 중심’, ‘유색인에 대한 백인 중심’,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 중심’ 따위로 변형됩니다. 자연을 연구하여 개조할 수 있듯이, 서양은 비서양을 연구하여 개조할 수 있다는 발상 따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강자 중심의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서구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이 ‘자기중심주의’에서 여러 주제가 파생됩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개조하려는 ‘도구적 합리성’이나 ‘자기’만이 중심이라는 ‘절대화’의 논리가 대표적이죠. 그러면 ‘자기’ 아닌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연히 ‘자기’를 따르거나[동일화] 배제되어야[배타성] 하겠죠. 물론 잘 따르(게 하)거나 잘 배제하기 위해선 다시 ‘도구적 합리성’이 필요할 겁니다. 선진화가 곧 서구화라는 발상이라든지, 미국 같은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이 곧 우리의 발전을 이루는 길이라는 논리 따위가 ‘동일화’의 논리죠. 오늘날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분쟁에는 ‘배타성’의 논리가 작용하는 거고요. 이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이성은 ‘도구적 합리성’이겠죠?

※관련 문제: 연세대 2000학년도 자연계, 고려대 2002학년도 정시.

(2) 동서양의 만남

지금까지 동양은 ‘서양인의 눈으로 본 동양’, 즉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앞에서 봤듯이, 이것은 ‘서구중심주의’의 산물입니다. 그러면 서양인들은 왜 그렇게 동양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요? 그야 ‘아는 것이 힘’의 논리죠. 동양을 잘 알아서 잘 이용하자는 발상에서란 겁니다. 당연히 동양은 미개하고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였죠. 그러나 서구 문명이 위기에 봉착하자 새삼 동양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동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세계관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것은 서구의 ‘기계론’에 대한 ‘유기체적’ 또는 ‘전일적(全一的)’인 세계관입니다. 세계를 기계처럼 질서정연한 것으로 보는 서구와 달리,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이어져서 상호의존, 상호작용한다는 발상이죠. 이것이 오늘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제할 새로운 가치관이라는 겁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동서양의 교류를 이루어야 할 듯합니다.

“우리 학문과 사상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재창조하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적 지식인의 사명 아닐까요?”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의 석판화 <해방>. 현대 문명은 이분법이 지배해 왔다. 그 속에서 선과 악, 진보와 퇴보, 남과 여, 서양과 동양은 위계질서를 이루었다. 이제 저마다의 모양, 저마다의 색깔, 저마다의 몸짓으로 날아오르는 새로운 문명을 꿈꿀 때다. 그대 한국의 젊은이여, 부디 한국적 지식인으로 날아오르길….
그런데 문제는 동양인인 우리가 동양적 발상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동양인 스스로가 자기를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거죠. 이것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라 하죠. 이런 시각을 가지는 한, 대등한 동서양의 교류는 요원하다 하겠습니다. 반면, 서구 문명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곧바로 ‘동양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호들갑스럽게 과대 포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동양이 서양을 대체하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전혀 동양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전일적이란, 모두가 이어져서 하나라는 발상입니다. ‘하나이자 모두, 모두이자 하나’라는 거죠. 이것은 ‘차이의 공존’ 또는 ‘다름의 소통’을 뜻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말이죠. 이 발상이 동서양의 교류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도 동양은 동양 자신에 좀더 충실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관련 문제: 서울대 2005학년도 수시, 한양대 2002학년도 정시, 경희대 2001학년도· 2005학년도 정시, 동국대 2003학년도 정시.

(3)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이라 해서 늘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시대가 원하는 지식인의 상도 바뀝니다. 가령, 과거처럼 독재에 시달리는 시대라면, 민주화와 같은 ‘거대 담론’을 제시하고 큰 틀에서의 변화를 모색하는 지식인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작은 것들의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라면, 각자 자기 영역에서 다양하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지식인을 원하겠죠. 따라서 여러분들이 지식인상을 제시할 때에도 이런 변화된 시대상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인의 유형도 다릅니다. 어떤 지식인은 권력이나 자본, 즉 기존 질서에 편승해 그것을 유지하는 일에 봉사합니다. 반면 어떤 지식인은 정반대에 서서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일을 합니다. 논술은 ‘비판적 지식인’을 요구합니다. 왜일까요? 여러분이 젊은이이기 때문이고, 이 시대가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지식 자체가 권력이 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정립하는 것도 꼭 해둬야 할 과제입니다.

※관련 문제: 서울대 2001년 제2회 경시대회(이 문제는 아주 어렵긴 하지만, 오늘날의 지식인의 모습을 잘 정리하고 있으므로 꼭 한 번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적 지식인으로서 세계로!

여러분은 한국인입니다. 이후 지식인이 되더라도 한국의 지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주로 세계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세계화’다 보니, 문제도 세계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게 대부분이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지식인이 갖춰야 할 태도는 뭘까요?

서울대 2005학년도 수시에서는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학문의 변화’를 소개하고, 그에 대처하는 한국적 지식인의 모습을 요구하는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지식인이 세계적 차원의 문제에 보이고 있는 태도는 어떠한가, 그 태도로 당당하게 세계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어디서 문제가 생겼을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는 무엇이고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한기/일이관지 논술연구모임(ilgwan.net) 대표, 서울강남청솔학원·부산해운대청솔학원·광주플라톤아카데미 출강중, 저서:<우한기 논술25강>(2004, 이슈투데이), <대한민국 대표 논술>(2005, 사회평론)
결국 한국의 지식인이 세계로 들고 나갈 것은 ‘한국적’인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학자들은 서구의 것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죠.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그걸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기껏해야 남들이 해놓은 것 베끼는 정도일 텐데요. 따라서 오늘 한국의 지식인이 집중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우리 것’입니다. 우리 학문과 우리 사상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게끔 재창조하고, 그것을 오늘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적 지식인의 사명 아닐까요? 모쪼록 위대한 학자, 위대한 사상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세계에 선물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일 겁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꼼짝마 논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