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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1 15:48 수정 : 2007.06.21 15:56

<어바웃 어 피터 팬>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어바웃 어 보이>의 30대 백수 윌을 기억하시는지? 아버지의 유산으로 살아가는 유유자적 인생. 혹시라도 누가 자기 삶에 ‘책임’이라는 덤터기를 씌울까봐 전전긍긍하는 남성 캐릭터의 전형이다. 이리저리 변형된 모습의 ‘윌’들은 현실 세계 곳곳에 감기 바이러스처럼 포진해 있다.

“이상해. 그 남자, 갑자기 연락을 안 하네.” 이런 고민 해보지 않은 여자는 드물 것이다. (안 해봤다면 … 복 받으신 거다) 내 친구 ㄱ도 그랬다. 상대는 소개팅으로 만난 한 살 차이의 회사원. 피차 첫눈에 반해 불같은 열정으로 활활 타오른 건 아니었다. “둘 다 나이도 있으니까 그게 더 자연스럽잖아. 그래도 한 달째 만나고 있다고.” ㄱ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꽤 진지한 만남이었어. 그만하면 나무랄 데 없는 남자였거든. 매너 좋고 자상하고 쿨하고 혼자서도 자기 생활 잘하고. 이 정도 남자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닷새째 전화가 없어. 내가 보낸 문자는 씹어 버리질 않나. 세상에,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마지막 만났을 때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ㄱ이 지나가는 말로, 다음 주말에 친구 결혼식이 있는데 다른 애들은 다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데려올 것 같다고 했을 뿐. ㄱ은 내심 이 남자가 함께 가주겠다고 말하리라 기대했으나 남자는 못 들었다는 듯이 “여기 커피가 좀 쓰네”라고 혼잣말을 뱉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게임 끝.

헤어질 때 ‘일방적 연락 두절 전법’을 쓰는 남자들, 적지 않다. 그 무책임한 이별법에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여자들은 이구동성 말한다. “그래도 서로 호감을 가지고 만난 사이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잖아.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이제 그만 만나야겠고 하면 누가 뺨이라도 갈긴다니?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진다니? 대체 왜 그렇게 도망치듯 연락을 뚝 끊어 버리는 건데? 왜?”

뭐 정말로 손가락이 부러졌다든지 급작스레 불치병이 발견되었다든지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경우도 있겠다. 그러나 그 남자들의 대부분은 그냥 도피한 것뿐이다. 책임지기 싫어서, 아니 책임지게 될까봐 두려워서, 차라리 줄행랑치는 방법을 택한 거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얼결에 상대방 페이스에 말려들어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부닥치면 어쩌지?(이들에게 마음의 준비가 완료되는 날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관계를 잘라 버리자.’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여자가 울거나 화를 내면 어떡하지?(이들에게는 예상에 없는 상황이 가장 곤혹스럽다. 제 안의 미숙함이 드러나 버리기 십상이니)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잠수해 버리자.’

휴 그랜트 주연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은 영국의 인기 작가 닉 혼비의 소설이다. 소설의 한국어판 제목 옆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어릴 땐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저절로 되는 게 어른인 줄로만 알았는데, 공무원 되기만 어려운 세상인 줄 알았는데, 어른 되는 것도 거저먹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보다. 쪽팔려도 꾹 참고 견뎌내기, 무서워도 꾹 참고 도망치지 않기. ‘꾹 참아내기’의 그 지난한 과정을, 윌을 닮은 늙은 피터 팬들이 얼마나 더 미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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