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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04 16:37 수정 : 2007.07.05 15:55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사진 오른쪽)는 완벽남 에이든과 결국 헤어진다.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구두는 발에 꼭 맞는 듯 보였다. 일부러 맞춘 것 같다며 판매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동행한 친구도 맞장구쳤다. “가격도 너무 좋다. 망설이지 말고 그냥 사.” 아닌 게 아니라 거울에 비춰 본 발 모양은 제법 근사했다. 분홍색 가죽은 달콤한 딸기우윳빛이고, 발등에는 투명한 크리스털 비즈가 조르륵 박혀 있다. 카펫 위를 조심스레 걸어 본다. 왼쪽 새끼발가락이 조금, 아주 조금, 불편하다. “새 신발이라 그래요. 신으면 금방 늘어난다니까요.” “그래. 딱 네 사이즈 맞는데, 뭘.”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나는 지갑을 열었다.

집에 들고 들어오니 평소 “신발장의 저 많은 것들은 국 끓여 먹을 거냐?”던 어머니가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라고 한 마디 던지신다. 귀 얇기로 따지면 국가 대표급인 이 몸, 그제야 안심이 된다. 처음 신고 모임에 나간 날, 내 새 구두가 중심 화제에 오른다. 어디서 얼마에 샀느냐는 질문공세를 받는 동안 뿌듯함이 차오른다. 그 구두 속에서, 새끼발가락의 살점이 짓이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다.

그 분홍색 구두처럼, 누구나 탐내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남자. <섹스 앤 더 시티>의 완소남 에이든이 바로 그렇다. 그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꿈꿔온 남자친구’다. ‘일등 신랑감’이라 해도 무방하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시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대라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에이든의 이름을 말하곤 한다. 그의 장점? 착하고 자상하고 다정다감하고 따뜻하고 능력 있고 책임감 있고 키도 크고 ….(숨차서 이하 생략) 어디 그뿐인가. 옛 애인과 바람피우고 돌아온 여자친구를 용서해 주는, 하해와 같은 이해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에이든의 진가는 종잡을 수 없는 언행으로 캐리의 애를 태우는 ‘미스터 빅’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빅 앞에서 캐리는 늘 약자에 가깝다. 불안해하고 조바심 내고 괜히 혼자 토라지는 등, 홀로 ‘생쇼’를 하면서 상대남의 페이스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그러나 에이든과 함께 있을 때의 캐리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툭하면 짜증 내질 않나, 당신과의 키스는 숨이 막힌다고 고백해 상처 주는 것쯤은 예사고, 애써 데려간 전원주택에선 하이힐에서 내려올 생각도 없이 종일 무료해할 뿐이다.

에이든의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다수의 여성 시청자들은 가슴 치며 답답해한다. 천사 같은 남자친구의 속을 썩이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캐리에게 본격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이때부터다.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결혼하자는 데 그녀는 무얼 망설이는 것일까? 청혼하며 건네준 반지를 왜 선뜻 손가락에 끼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 캐리는 에이든의 청혼을 거절한다. 화면 밖의 구경꾼들은 혀를 찬다. “쯧쯧, 저런 복에 겨운 x”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형성하고 “차라리 잘됐다. 에이든도 얄미운 캐리에게서 벗어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잘못은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 달랐을 뿐이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구두 디자이너의 작품이래도, 발등에 진짜 다이아몬드가 총총히 박혔대도, 내 발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까. 모든 걸 갖췄으나 설명할 수 없는 딱 한 가지 때문에 먼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없는 남자. 배부른 고민이라고 비웃을 자 그 누구냐. 새끼발가락의 통증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인간이란 본디 그런 존재인 것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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