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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사랑에 빠지면 변신한다. 10대 프랑스의 소녀와 중국인 남자의 사랑을 그린 영화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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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모든 건 자명한 사실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소녀들은 영악하다. 우리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들은 잔망스럽다. 예컨대 마르그리트는 자전적 소설 <연인>에서 이런 독백을 서슴지 않고 날려 버린다.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리다니. 또래의 남자애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지 못한다.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수록 소녀들은 소녀 X로 변해 간다. 그러므로 자명한 사실이란 곧 소녀들은 모두 둔갑술의 천재, 변신기계라는 점. 소녀들의 천적은 이제는 둔갑을 멈춘 소녀들, 곧 엄마들이다. 중국 남자와 연애하느라고 자기 딸이 학교도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외박하는 날이 잦아지자, <연인>의 엄마는 기숙사 원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붙잡아 두고 싶으면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야 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남자 어른은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법정 스님 정도? 글쎄, 무소유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니, 엄마와의 전쟁에서 소녀들은 백전백패다. 넷 쌍둥이도 거뜬히 구별하듯이 엄마는 소녀가 몇 번을 둔갑해도 금방 알아차린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소녀들에게 무조건 지게 돼 있다. 사랑을 알게 되면 소녀들은 변신하기 때문이다. 뒤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그 해,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 지금의 이런 얼굴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게 어떤 일인지 나한테 묻지 마라. 어쨌든 그 일을 겪고 나면 소녀들은 모습이 바뀐다. 이거 미칠 지경이 아닌가? 사랑하는 순간, 사랑하는 얼굴은 모습이 바뀐다니. 영원한 마루운동계의 강자 구미호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무소유 정신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일까?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연인>의 중국인 남자는 소녀가 뜨거운 여자이며, 앞으로 사랑의 행위를 즐기게 될 것이며,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식으로 모든 남자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둘이서 함께 살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다른 놈과도 함께 살지 못하게 퍼붓는 저주다. 이 남자한테 “붙잡아 두고 싶으면 자유롭게 내버려 둬야만 한다는 거, 몰랐어?”라고 물으면 소설 속에서 이 남자가 그렇듯 또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안다고 다 실천한다면 누구나 법정 스님이게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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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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