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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1 16:39 수정 : 2007.07.11 18:48

소녀들은 사랑에 빠지면 변신한다. 10대 프랑스의 소녀와 중국인 남자의 사랑을 그린 영화 <연인>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모든 건 자명한 사실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소녀들은 영악하다. 우리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녀들은 잔망스럽다. 예컨대 마르그리트는 자전적 소설 <연인>에서 이런 독백을 서슴지 않고 날려 버린다.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리다니. 또래의 남자애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지 못한다.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수록 소녀들은 소녀 X로 변해 간다. 그러므로 자명한 사실이란 곧 소녀들은 모두 둔갑술의 천재, 변신기계라는 점.

소녀들의 천적은 이제는 둔갑을 멈춘 소녀들, 곧 엄마들이다. 중국 남자와 연애하느라고 자기 딸이 학교도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외박하는 날이 잦아지자, <연인>의 엄마는 기숙사 원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붙잡아 두고 싶으면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야 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남자 어른은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법정 스님 정도? 글쎄, 무소유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니, 엄마와의 전쟁에서 소녀들은 백전백패다. 넷 쌍둥이도 거뜬히 구별하듯이 엄마는 소녀가 몇 번을 둔갑해도 금방 알아차린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소녀들에게 무조건 지게 돼 있다. 사랑을 알게 되면 소녀들은 변신하기 때문이다. 뒤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그 해,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 지금의 이런 얼굴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게 어떤 일인지 나한테 묻지 마라. 어쨌든 그 일을 겪고 나면 소녀들은 모습이 바뀐다. 이거 미칠 지경이 아닌가? 사랑하는 순간, 사랑하는 얼굴은 모습이 바뀐다니. 영원한 마루운동계의 강자 구미호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무소유 정신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일까?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연인>의 중국인 남자는 소녀가 뜨거운 여자이며, 앞으로 사랑의 행위를 즐기게 될 것이며,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식으로 모든 남자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둘이서 함께 살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다른 놈과도 함께 살지 못하게 퍼붓는 저주다. 이 남자한테 “붙잡아 두고 싶으면 자유롭게 내버려 둬야만 한다는 거, 몰랐어?”라고 물으면 소설 속에서 이 남자가 그렇듯 또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안다고 다 실천한다면 누구나 법정 스님이게요? 엉엉.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남자들은 그게 변심이라고 말하겠지만, 소녀들은 변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던 당시 열일곱의 뒤라스를 알았던 사람들은, 2년 후 열아홉이 된 뒤라스를 다시 만났을 때 몹시 놀란 것이었다. 성형수술도 그런 성형수술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 자기 얼굴이 됐기 때문에. 그 얼굴을 만들어 준 사람이 무소유 정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중국인 남자라는 걸 이제쯤은 알 수 있으리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열렬하면 열렬할수록 소녀들은 더욱 더 변신해 간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 중국인 남자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이런 말들이 슬프게 느껴진다면, 제대로 사랑한 사람들이다. <연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때로 슬픔에 잠긴 엄마와 소녀가 이륜마차를 타고 건기의 밤하늘을 보러 들판으로 가는 부분이다. “밤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순간마다 새로운 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녀들도 일신우일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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