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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29 21:05 수정 : 2007.08.29 21:05

결혼 앞에서 주춤거리는 준영에게 사랑의 상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한 장면.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남자남자

남자는 여자의 어떤 말을 가장 두려워할까. 혹시 이건 아닐까. “나 선볼 것 같아. 어쩌지?” 침실 파트너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사이의 여자 연희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남자 준영은 멍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곧 짜증이 났을 것이다. 날더러 대체 어쩌라고, 싶었으리라.

뒤틀린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나직이 쏘아붙인다. “그냥 당신 생각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선볼 계획 같은 건 첨부터 없었어.” 진부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다. 이로써 여자는 ‘결혼 상대자’ 예비 목록에서 남자의 이름을 지우게 되었으니. 하기야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 앞에서 부부인 척 연기하고 살자는 남자, 대신 밤일만은 진짜로 하자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제안을 해오는 남자를 세상의 어떤 여자가 믿을 것인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연희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사회적 안정을 위해 결혼이라는 형식 속에 몸을 담갔으되 옛 애인과 이중생활을 하는 그 여자의 행동이 본의든 아니든 제도를 교란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럴 수가. 이제 다시 감상해 보니,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연희가 아니라 준영이었다. 준영에게 주목해 보면, <결혼은…>은 세태풍자극이 아니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초절정 비극이 된다. 성정의 우유부단함과 영혼의 뺀질뺀질함, 그리고 경제적 무능함을 가진 한 젊은 남성이 제도 앞에서 느끼는 주눅을 냉소와 자조로 표현하며 뻗대다가 결국 처절하게 무릎 꿇게 되는 사연인 것이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영문학과의 노총각 시간강사인 준영이, 나이·직업·출신 학교를 묻는 맞선녀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장면을 기억한다. “아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요?” 이 너무나도 순진한 역설법은 ‘시장’에서 그 조건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사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본인이 못 가진) 그 따위에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제도권 속으로 쑥 진입하기에, 혹은 제도권 밖에서 격렬히 저항하기에, 별 변변한 무기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제도를 얕잡아 보는 태도를 표방한다. ‘나는 까짓 결혼 같은 것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거짓말하고 살 자신은 없으니까’라고 지레 선을 긋고 들어가는 그 심리를 자격지심의 일종이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그,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정(情)! 지 내킬 때 왔다가 지 내키는 대로 사람 속 뒤집고서 지 내킬 때 휙 떠나 버리는 나쁜x, 연희를 사랑하게 되고 만 거다. 마지막을 예감한 뒤에야 “근데 무슨 음식 좋아해? 또 뭘 좋아해?”라고 묻는 이 자기중심적인 남자, “네가 오면 널 돌려보낼 자신이 없어”라고 무기력하게 고백하는 이 못난 남자, 드디어 흉부에 돌이키지 못할 치명상을 입었다.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다. 이제 와 관계를 청산하려 해도 쉬울 리 없다. 이미 케이지에 갇힌 청설모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 여자가 질금질금 던져주는 사료에 모욕과 감격을 번갈아 맛보는.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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