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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온 헌터부부가 강변 식탁에 진녹색 보를 깔고 잘 닦인 금속 나이프와 포크를 놓았다. 그리고 브로콜리 스파게티와 20년 된 적포도주로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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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43) 몬태나를 지나 이번 여행의 아홉 번째 주이자 마지막에서 두 번째 주인 아이다호로 들어오면서 풍경이 확 바뀌었다. 원시림에 가까운 삼림이 펼쳐진다. 서쪽에서 오는 비구름이 캐스케이드 산맥을 가뿐히 넘고 로키 산맥에 2차 도전을 하다가 실패, 공중에서 우물쭈물하다가 힘이 빠져 빗방울이 돼서 떨어지는데 덕분에 아이다호가 촉촉히 젖는다. 나무가 잘 자라 삼나무들이 무성하다. 흠이라면 날씨가 변덕스러워 5분 뒤 날씨를 점칠 수 없다. 파월(Powell) 부근의 화이트하우스 야영장에 도착해 텐트를 치려는데 세찬 비가 내렸다. 모닥불을 지펴 깡통 스파게티를 끓여 먹으려던 차였다. 버너와 코펠을 집으로 보낸 뒤 그 동안 조리를 단념해왔는데 카를로스와 고르고 스페인 형제에게 ‘비법’을 전수 받았다. 그들은 조리기구가 없어도 매일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 그 비결은 캔에 든 음식을 사서 모닥불 위에 통째로 올려놓고 끓이는 것이었다. 따로 그릇과 불 피울 도구가 필요 없다. 불쏘시개 감으로는 여행안내센터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관광 안내 소책자들을 썼다. 성냥과 젓가락 한 벌만 있으면 되니 요긴한 방법이다. 우당탕탕 흐르는 록사강(거친 강) 야영장서
감방 다녀온 문신투성이 거친 사내와 조우
욕-단어-욕…남자끼리 놀려고 피신했단다
맥주 계속 따더니 드디어 마리화나
다른 세상서 깨어난듯 그의 눈이 땡글해졌다 그들이 김을 후후 불어가면서 스파게티를 먹는 것을 보고 당장 따라서 했다. 식료품점에는 캔에 든 음식 가짓수가 생각보다 다양했다. 아스파라가스, 옥수수, 콩, 스파게티, 소시지 등. 여행자의 간결한 삶이 풍요로워진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미국에서는 집 없는 거지들이 그렇게 조리한다고 일러줬지만 나는 “그게 어쨌다고?”라고 반문했다. 매일 등을 누이는 곳이 내 집이라는 점에서 집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다. 차이가 있다면 내게는 한시적인 생활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인생자체가 한시적이다. 근데 이 조리법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캔의 밑이 타고 위는 덥혀지지 않기 때문에 젓가락으로 꼭 저어줘야 한다는 점.
원시림 무성한 아이다호주 단점은 이렇게 비가 쏟아지면 불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잽싸게 나무를 한 단 해가지고 지붕이 있는 화장실로 튀었다. 천둥 번개가 요란하더니만 30분만에 거짓말처럼 날씨가 말끔히 개었다. 해질 무렵이어서 붉은 노을이 들었다.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의 역사를 소개한 책자를 찢어서 불을 피우고 바라보니 옆으로 록사 강(Lochsa River)이 우당탕탕 흐른다. 록사 강은 인디언말로 거친 강이라는 뜻. 지금까지 묵은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내 옆 사이트에는 픽업 트럭을 타고 온 두 남자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아까부터 텐트를 치고 있다. 처음 들어올 때 인사를 나눴는데 왠지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일부러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내가 그 옆에 바짝 몸을 붙여온 셈. 미국을 여행하면서 바이크 라이더 외에도 다종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내게 관심을 두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뭐랄까 조금 교양과 수준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살기 바쁜데 자전거 타고 가는 동양녀석에 대해 관심을 베풀 겨를들이 보통은 없다. 이 야영장에서 만난 해리와 바바라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접근하는 사람들이다. 남편 해리는 치과의사고 부인 바바라는 간호학과 교수다. 이들은 91살인 해리의 어머니 제시와 함께 이곳에 RV를 대놓고 한달 동안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지낸다. 해리는 수채화를 그리고 바바라는 록사 강에서 플라이 낚시를 한다. 그림 같은 삶이다. 플라이 낚시는 파리모양의 인공미끼를 써서 플라이 낚시라고 한다. 핵심은 미끼를 흐르는 물에 띄우는 것. 물 속으로 집어넣는 게 아니다. 물을 따라 파리가 흘러가듯 미끼를 던지면 컷스로트 송어(cutthroat trout)가 공중으로 날아서 물로 내려오는 길에 미끼를 덮친다. 그 때 낚싯대를 잡아당겨야 하는 게 플라이낚시의 요체. 바바라는 20여가지가 넘는 플라이미끼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양이 진짜 파리처럼 정교하게 생겼다. 이들은 자식은 없고 자식만큼 사랑하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세 사람 모두 목에다 호루라기를 매고 개가 멀리 가면 호루라기를 불어서 불러들인다. 이 망할 놈의 개는 나를 보고 계속 짖어댔다. 그들은 아침에 뜨거운 커피와 과자 그리고 파인애플을 내게 대접했고 바바라는 아몬드와 무화과 열매 그리고 마쉬 맬로를 비닐 봉지에 담아놓았다가 여행할 때 먹으라고 건네줬다. 91살의 제시는 무사히 여행할 것을 기원하면서 내 볼에 입맞춤을 했다. 특별한 축복이었다. 그리고 돈과 론도 특별했다. 그들은 내 옆 사이트의 주인공들. 두 사람은 인근 도시에서 온 식당 요리사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미국을 횡단 중이라고 하자 한 순간 경계를 풀고 자신들의 텐트 사이트로 초대했다. 둘 다 63년생으로 나와 동갑. 론이 온 몸에 문신을 한데다 교도소를 다녀왔다고 말해서 잠시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미국 와서 전과자와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다. 그는 말끝마다가 아니라 한 단어에 하나꼴로 퍽(fuck)과 싯(shit)을 번갈아 썼다. 욕설이다. 한국의 조폭 영화를 보면 현실성 있게 묘사한다고 욕을 어색할 정도로 많이 섞는데 론은 그 이상이다. 그는 “You fucking wanna stone?”이라고 물었다. 씨팔 마약 한번 할래? 라는 뜻이다. 그 비싼 마약을 공짜로 주겠다니. 마다할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십 년 전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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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인 두 사람은 여자들을 피해 록사 강변의 캠프장에서 남자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게는 이번 여행에서 마주친 특별한 만남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왼쪽이 돈이고 오른쪽이 론(모자이크 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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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욕심에 반병이나 마셨다 맛난 음식 갈망이 이토록 컸나
아직 내 안으로 못 들어간 거다 로웰의 와일드 구즈 캠프장(Wild Goose Campground)에 텐트를 치고 록사 강에 비누 한 장 들고 목욕하러 갔다. 물론 옷은 벗지 않고 세탁도 겸해서 한다. 합성 세제인 비누와 몸의 때 중 어느 쪽이 강물을 더 오염시킬까. 미안한 마음으로 몸에 비누칠하고 수영을 한다. 머리도 감아야 하기 때문에 물 속으로 잠수했다. 물고기 떼들이 이상한 괴물의 침입에 놀라 흩어진다. 내 옆 사이트에는 RV가 주차했다.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온 헌터 부부. RV는 길이가 13.나 됐고 뒤에 지프차도 매달고 다녔다. RV 한 대가 1억원이 넘는다. 60년에 독일에서 건너 온 이들은 여전히 독일식 액센트를 쓴다. 헌터는 관광업계서 일하다가, 부인 엘리노는 보석 골동품점을 하다가 은퇴한 뒤 RV를 타고 세상을 유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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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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