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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3 23:15 수정 : 2006.03.24 14:33

아이다호 주의 인구 360명의 소도시 캠브리지에서는 로데오 순회 경기가 열려 모처럼 볼거리를 선사했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44)

아이다호 주까지 아홉 개 주를 여행하는 동안 사람들은 어느 주가 가장 아름다우냐고 묻곤 했다. 처음에 어느 주가 좋다고 얘기했다가 금방 답이 달라지게 돼서 그런 답을 안 하게 됐다. 한 줄기의 장거리 여행이 아니라 날마다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다. 장편시가 아니라 연작시다. 그런데 아이다호를 여행하면서 또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다호가 제일 좋다.

어디가 가장 아름다우냐는 질문에 답이 자꾸자꾸 바뀐다
인디언 부족 도주했던 계곡길 따라 연어의 강을 거슬러 올랐다
여행 막바지, 한 마리 미끈한 연어가 된 듯

화이트 버드 힐(White Bird Hill) 정상에서는 노란 산들이 두 줄기로 출렁거리면서 북서쪽으로 몰려가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괴의 사이가 화이트 버드 계곡이다. 나는 이 꼭대기까지 오는 동안 12번 13번 그리고 95번 길을 타고 왔는데 그전에는 전혀 몰랐던 인디언 부족 네즈 퍼스(Nez Perce)의 도주로를 거슬러 올라온 것이었다. 곳곳에 사적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 있는 표지판은 화이트 버드 계곡에서의 네즈 퍼스 부족의 위대한 승리를 전하고 있다.


횡단은 장편시가 아닌 연작시

추장 조셉이 이끄는 네즈 퍼스는 1877년 백인들의 공격을 피해 도피 중 이곳에서 미 기병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흰 깃발을 들고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페리 대위가 이끄는 기병대는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네즈 퍼스는 70명의 전사를 보내 100여명의 기병들과 대적했는데 승부는 0 대 34. 미 기병은 34명의 사망자를 내고 물러갔고 네즈 퍼스에는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자존심을 다친 백인들은 네즈 퍼스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고 네즈 퍼스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는데 좀 멀리까지 갔다. 캐나다 국경지대까지 1800㎞를 걸었다. 750명 중 500명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말이다. 무엇보다 2천 마리의 가축도 끌고 갔다. 여러 번 매복도 당하고 기습공격도 받았지만 소걸음의 네즈 퍼스는 말 탄 부대를 유유히 따돌렸다. 자유와 안전의 나라 캐나다로 넘어가기 직전, 국경에서 64㎞ 떨어진 지점에서 넬슨 마일스 장군이 이끄는 2000명의 습격을 받았다. 닷새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추위와 허기에 시달린 그들은 곰발(Bear Paw) 산맥에서 무릎을 꿇는다. 내겐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수전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가 멕시코까지 가지 못하고 그랜드 캐년에서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때 조셉 추장이 계속 싸우자는 동료들에게 항복을 설득하며 한 말이 더 가슴을 친다.

“내 말을 들어라, 추장들이여. 나는 지치고 내 가슴은 쓰라리고 슬프니. 이제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는 나는 영원히 싸우지 않으리.”

투항이 고난의 끝은 아니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캔자스 주 동부로 소개됐다가 나중에 인디언 집단거주지역이 되는 오클라호마 주로 끌려갔다. 그곳은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와 천양지차인 사막성 평원이다. 조셉 추장은 루더포드 헤이에스(Rutherford Hayes) 대통령에게 통사정하기 위해 수도 워싱턴까지 걸음을 했다. 그들은 1885년에야 태평양 연안의 북서부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여전히 고향 왈로와 계곡(Wallowa Valley)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아이다호 주에서 어느 날 텐트를 치고 바라본 서녘 하늘. 저 먹구름 너머에 내가 갈 곳이 있다.
네즈 퍼스라는 말은 ‘뚫은 코’라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1805년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를 수행했던 프랑스 통역이 잘못 갖다 붙인 게 그대로 굳어졌다. 그들은 코를 뚫는 풍습이 없다. 자신들은 니미푸(Nee-Me-Poo)라고 부른다. ‘진정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진정한 사람’이라는 근사한 부족명이 뚫은 코로 불리고 있으니… 역사는 확실히 승자가 기록한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그러나 패자들이라고 하면 상상력의 비약일까. 조셉 추장의 원래 인디언 이름도 힌-무트-투-야-라트-케크트(Hin-mut-too-yah-lat-kekht). 뜻은 ‘산속에서 울리는 천둥’이라는 뜻이다.

95번 길은 새먼 리버(Salmon River, 연어의 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마치 내가 회귀하는 한 마리 연어가 된 것 같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연어 강 상류에서 부화돼 바다를 향해 떠내려가는 치어였다. 쉽게 지치고 힘들어 하고 조바심도 냈다. 오랜 여정을 거쳐 지금은 미끈미끈한 비늘을 가진 성어가 돼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무보트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래프팅 족들이 손을 흔들어준다. 새먼 리버와 리틀 새먼 리버가 합쳐지는 리긴스(Riggins)라는 마을은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 인공적으로 만들기 전에는 그런 형상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희한한 모양의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산속에서 울리는 천둥’의 투항

새먼 리버는 1500만년 전부터 흘렀다고 하는데 수심도 깊고 여울에서는 물살도 빠르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하는 강(A river of no return)으로도 불린다. 검푸른 바다 빛이다. 키 15㎝의 어린 치누크 연어와 스틸헤드 송어가 바다에서 돌아올 때는 몸무게 9-13㎞의 수영 기계가 돼서 돌아온다고 한다.

새먼 리버를 경계로 다시 마운튼 타임으로 변경됐다. 몬태나에서 아이다호로 넘어올 때 시간이 마운튼에서 퍼시픽 시간대로 들어와 또 한 시간(지금까지 모두 세 시간)을 벌었는데 새먼 리버를 건너 리긴스에 들어올 때 마운튼 시간대로 되돌아간다. 리긴스는 아이다호에서 서쪽에 있는데도 동쪽보다 시간은 한 시간 빠른 이유가 뭘까. 리긴스의 시청 서기도, 음식점 주인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좀 연구를 했다.

미국에서는 4월 마지막 주 일요일 사이에 시침을 한 시간을 앞당기는 일광시간절약제가 실시된다. 이 상태로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 간다. 안 그래도 일찍 일어나는 농부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생활의 리듬이 깨진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연방법은 일광시간절약제를 실시하지 않으려면 주 전체가 빠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새먼 리버 서쪽에서 사는 일광시간절약제 폐지론자들은 아이다호 주 전체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실패하자 대신 주민투표를 통해 새먼 리버 서쪽 지역의 시간대를 퍼시픽에서 마운튼으로 한 시간 빠르게 옮겼다. 그러니까 일광시간절약제가 시행되면 오전 2시를 오전 1시로 시침을 옮겨야 하는데 이미 시간대를 한 시간 빠르게 옮겨놓아 오전 3시니까 한 시간 앞당기면 원래의 오전 2시가 돼서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10월 말에는 시침을 오전 3시로 시침을 늦추기 때문에 원래 시간보다 한 시간 늦지만 당기는 것은 몰라는 늦추는 것에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한 시간 더 늦게 출근해도 된다. 나로서는 자전거를 타고 시차가 바뀌는 것을 경험하려면 몇 개 주를 달려야 했는데 아이다호에 와서 며칠 상관으로 시차를 두 번이나 바꾸는 ‘기적 같은’ 경험을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섭씨 43도 지옥 피해 새벽라이딩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섭씨 38도. 쉽게 지치고 목이 마르다. 리긴스 가는 길에 살썩는 냄새가 나더니 새끼 사슴이 눈을 뜬 채 죽어 있다. 이어 단내가 났다. 길가에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려 있다. 이 사슴은 산딸기를 먹으려고 찻길을 건너다 횡사한 듯하다. 자전거에서 내려 이 사슴 몫까지 산딸기로 배를 채웠다. 손바닥과 입가가 검붉은 물이 들었다. 서울에 살 때도 탄천을 뛰다가 천변에 산딸기 밭이 나와서 갈증과 허기를 달랜 기억이 났다. 지금은 없어졌겠지.

캠브리지(Cambridge)에서는 로데오 경기가 열렸다. 소일거리가 없는 이 일대에서는 프로야구 챔피언시리즈와 맞먹는다. 인구 360명의 마을인구보다 훨씬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식전 행사는 엄숙했다. 관중들은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모두 일어서서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도록 기원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테러는커녕 좀도둑도 없을 것 같은 이 촌에서는 지나친 의식 같아 보인다. 미국 농촌에서는 압도적으로 자신들의 이해와 상반되는 자유무역주의의 공화당을 지지한다. 캠브리지의 여왕도 뽑았는데 아이다호 주립대생 앤드레아 윌킨슨이 캠브리지의 여왕으로서 한 일이라곤 금박이 요란한 옷을 입고 그냥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말 타고 서 있는 것이었다.

경기 종목은 황소에서 안 떨어지기, 수송아지에서 안 떨어지기, 말에서 안 떨어지기, 밧줄로 묶기, 도망가는 소잡기 등 다양했다. 행사의 백미는 황소에서 안 떨어지기인데 오래 타면 이기는 건 줄 알았더니 룰이 복잡하다. 8초까지만 타면 되고 그 8초 동안 온갖 묘기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 연기에 대한 평가는 선수와 소에 대해 따로 매겨서 합산한다고 한다.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도 소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경기.

로데오 선수들은 순회 경기를 하는데 큰 도회지에서는 몇 만 명이 모여든다고 한다. 불과 몇 백 명의 관중을 놓고 열의를 다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기준시간 8초도 못 채우고 소에서 떨어진 뒤 줄행랑들 친다. 그러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광대 두 사람이 달려가서 소의 관심을 자기들 쪽으로 유도해 선수를 보호한다. 관중들은 식전 행사로 펼쳐진 어린이들의 로데오 경기가 더 나았다고 소리 질렀다.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술집으로 몰려갔다.

케임브리지 마을 로데오경기 좀도둑도 없을 곳인데
식전 테러와의 전쟁 기원 여왕 뽑고 도망가는 소잡기…
황소에서 안떨어지기 8초도 못채우고 줄행랑

캠브리지 모텔 뒤 잔디밭에 텐트를 쳤는데 새벽 3시 반이 되자 근처 RV에서 알람 시계가 울리듯 지속적으로 삐삐 소리가 나서 잠을 깼다.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어 모처럼 새벽 라이딩을 했다. ‘반칙’이다. 아직 태양은 안 일어났다. 헬스 캐년(Hells Canyon)으로 가는 동안 허겁지겁 좇아오는 햇볕을 등으로 느꼈다. 이 ‘지옥의 계곡’은 대낮에 섭씨 43도까지 우습게 올라간다. 그랜드 캐년보다 규모는 작지만 양감은 더욱 깊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미국에서 가장 깊은 계곡이기도 한다. 능선이 부드럽고, 높이 2000m 안팎의 봉우리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브라운리 저수지에는 물이 만땅으로 차 있어 ‘지옥의 계곡’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따뜻한 이미지다. 작렬하는 태양에 산은 노랗게 타 들어가고 있다. 그러니 호수의 물도 산을 받아들여 노란색이다. 지옥의 계곡으로 내려가는 10㎞ 구간 속도계의 시속은 48㎞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시속 30㎞ 이상 놓지 못했던 시절이 언제 있었나 싶다.

그렇게 쏜살같이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의 열 번 째이자 마지막 주인 오리건 주에 진입했다. 끝에 이를수록 보다 빨리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끝의 느낌이 어떨까에 생각을 모으고 싶은데 날마다 자연은 내 주의를 분산시킨다. 광활하고 새롭다. 나는 아이다호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결론을 다시 보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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