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1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적인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 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은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의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일거에 25% 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친구가 있다. 버논 포브스라는 이 친구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해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사람 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미국 정부 성토에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한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차를 항상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 아니한 일이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8600 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 운전의 80%가 집에서 13㎞ 이내의 거리에 집중된다. 몸무게 70㎏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 마력의 2000㎏의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새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지속 가능하고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 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의 진정한 해방, 소비적인 사회, 그리고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 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 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제 눈치 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의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중 300만 명의 열성당원들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매년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2000만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매년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세비키 혁명 직전의 짜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 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
페달을 밟으면 수직→순환→수평 혁명이 두번 일어난다
미국의 지배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에서 자전거는 반동이고 불온하다
심장을 엔젠으로 6744km, 그들을 본다
이번 여행 목적 중 하나는 골수 혁명가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Human Powered Vehicle Association’의 회원 600여명이다. 한글로 해서 인력거협회의 회원들. 사람의 힘으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운송수단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200m 구간 최고기록이 128㎞***(?)***까지 나왔다. 심장을 엔진으로 비행기에서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별별 종류의 운송수단을 개발하고 있는 위험한 인물들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 협회의 소식지를 통해 초대장를 띄웠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한국에서 온 여러분의 혁명 동지 홍XX올시다. 미국을 횡단하고자 하오니 지나가는 길 주위에 살고 있는 동지들께서는 짬을 내셔서 혁명 조직화에 동참해주시기 바람…본인들이 혁명가라는 걸 모르고 있는 동지 여러분들도 계실 텐데…혁명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면 그냥 여행의 단조로움이라고 피하고 싶으니…
최고의 존경을 바치며.
홍동지”
또 다른 혁명가들은 동료 라이더(rider)들이다. 이들은 혁명을 직접 실천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몇 달을 걸려서 미국을 건너는 일은 엄청난 선전선동 효과가 있다. 미 대륙도 자전거로 횡단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깟 회사까지 또는 학교까지 자전거를 안 타고 간다? 그렇게 자문하도록 만드는 이들이다. 이 같은 혁명의 대의에 복무하는 것은 웬만한 당성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투르드 드 프랑스를 5회 우승한 전설적인 선수 자크 앤퀴틸은 이렇게 말했다. “라이더는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자전거.” 같은 라이더로서 감히 첨언하자면 자전거는 다리의 연장일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다. 안장 위에서 보는 세상은 차 안에서 보는 네모 안의 세상과 다르다. 미국 횡단의 동반자로 자전거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전거가 지향하는 가치로 미국을, 그리고 내 자신을 보고자 한다.
내 자신 중에서 특히 몸의 반응이 궁금하다. 언젠가부터 몸이 나와는 분리된 존재라고 느껴왔다. 그래서 손님 대하듯 몸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데 무엇이 최적의 대우인지는 분명치 않다. 몸에게 일을 아예 안 시키면 게을러져서 결국 몸을 망치게 된다. 그렇다고 혹사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게 혹사하는 것인지는 혹사에 가까운 일을 몸에게 시켜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혹사의 한계를 시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몸에 대한 강도를 높여 가는 동안 계속 몸이 적응하면서 혹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그런 경지가 찾아오지 않을까, 몸이 알면 화낼, 앙큼한 기대를 걸고 있다.
대충 이런 곳을 지나갈 것 같다.
미국의 식민 역사가 시작된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의 대장원.
토마스 제퍼슨의 고향인 몬티첼로
블루리지 하이웨이
미국의 위대한 탐험가 대니얼 분 파크웨이
애팔라치언 광산촌
한때 속옷의 세계 수도라고 불리었던 캔터키 녹스빌
버번 위스키의 수도 켄터키 바즈타운
뽀빠이의 발상지, 일리노이주 체스터.
프랑스 식민촌, 미조리주 세인트 지네비에브
재산권을 지켜준 철조망의 고향 캔자스 라크로스
피어린 철도의 역사 서던 퍼시픽 라인.
몰몬 트레일
루이스와 클라크 트레일
세계 최초 핵발전 전기로 불을 밝힌 아이다호주 아르코시
자전거의 도시 오레콘 포틀랜드
서부 역마차 루트의 시발점 콜로라도주 푸에블로
기본 골격이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그 사이의 록키 산맥과 미시시피강, 대평원, 사막 등이라는 점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목적지들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라고 불리는 자전거 루트 선상에 있다. 이 트레일은 76년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레그와 준 시플 부부와 댄과 리스 브루던 부부가 재밌고 뜻깊은 일로 생각해 개척했고 그 해 2천명의 라이더들이 함께 횡단한 길이다. 물론 자전거 전용 루트가 아니라 기존의 도로들을 자기들 맘대로 자전거 루트라고 선을 그어 연결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주로 자동차가 다니던 도로에 숟가락 하나 더 놓은 것이어서 자동차 운전자들, 특히 트럭운전자들의 호의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근데 이 선이 길긴 길다. 6744㎞의 선이다. 어디 딴 데 안 새고 이 선 위로만 달려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열두 번을 왕복해야 하는 거리다.
이 트레일은 개척된 지 30년이 다 돼간다. 처음에 울긋불긋한 싸이클복을 입고 휙휙 지나가는 라이더들에게 물도 떠다 주고 잠도 재워줬던 이 선상의 순박한 주민들이 지금은 라이더들을 보고도 심드렁해 한다는 전문이다. 그 동안 속도와 경쟁의 미국문화가 이 선상의 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뒤바꿔 놓았을까. 혁명의 분위기가 과연 무르익었을까. 홍동지가 품고 있는 관찰 포인트다.
자전거 여행가이자 혁명의 동지인 윌리 위어가 말했듯 자전거는 마술이다. 아무리 꽁꽁 닫힌 사람의 마음도 열어 제친다. 자전거를 타고 미국인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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