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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26 21:19 수정 : 2006.01.18 17:00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2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1990년대 후반에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독립한 뒤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저술활동도 하고 있다.

첫눈이 내린 지난해 추수감사절 연휴였다. 텅 빈 학교 도서관에 남아 때이른 눈발을 바라보며 구글 검색창에 'cross country bicycle'이라고 처넣었다.

왜 미국을 자전거로 건너보자고 맘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화의 초기 증세에 들어선 탓인지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수원을 자전거로 다녀온 뒤부터 이런 종류의 자전거 여행이 예정돼 있었던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지난해 여름, 록키 산맥 최고봉인 해발 4399m 마운트 앨버트의 정상 부근에서 자전거로 기어올라오는 사람들을 목도하고 받은 충격이 이상한 심리적 전이과정을 통과하면서 나도 해보자는 오기로 변질된 탓일지도 모른다.

모두들 미쳤다고 했다. 미국인들도 이구동성이었다. 자동차도 아니고 자전거로 그것도 노숙을 하면서 미국을 횡단하는 것은 자살에 가까운 몰지각한 행동이거나 자기학대에서 쾌감을 느끼는 피학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한 미국인 친구는 “내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여행을 할만한 곳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미국에 이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총을 갖고 있는 줄 아느냐”고 말렸다. 또 다른 친구는 “미국의 도로들은 자전거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설계됐기 때문에 쌩쌩 달리는 화물차와 자동차에 언제든 치일 수 있다”고 겁을 줬다.


아무런 준비도, 정보도 없이 불쑥 말부터 꺼내 놓은 터여서 지금까지 몇 명한테 미국횡단 계획을 발설했는지를 세어보았다. 계획을 취소해도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까. 식언했다는 비웃음을 사더라도 생명을 부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 계획을 아는 사람들을 세어보니 생각보다 많았다. 항상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입 싼 게 문제였다.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 그럼 과연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그렇게 한 다른 사람들은 없었을까. 그걸 알아보기 위해 엔터 키를 눌렀다.

이 여행은 졸업기념이다. 5월13일 졸업식을 하고 공식 백수가 됐다. 백수가 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한 셈이다. 14년간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고 유학까지 와서 다시 2년간 학업과 일을 병행한 끝에 백수 대열에 합류했다. 누가 졸업식에 참석한 소감이 어땠냐고 물어왔다. 만 41살에 학위를 받았으니 감격스럽지 않았느냐는 뉘앙스였다. 왠걸, 나는 당황스러웠다. 주의를 집중했는데도 학부생인 학생대표의 답사가 잘 안 들렸다. 이 학생은 파격을 부린다고 일기 형식으로 지난 4년의 대학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 원망스러웠다. 처음 입학했을 때 안 들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교문을 나가는 마지막 문턱에서 영어청취력이 안 늘었다는 걸 확인하는 기분은 영 좋지 않다.

2년 학업끝내고 백수로

난 원래 청력이 안 좋아서 영어가 잘 안 들리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영어에 바치고도 안 들릴 리가 없다. 그렇다고 보청기를 낄 만큼 청력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귀는 그렇다고 치고, 입은 왜 안 열리는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대충 신체적 장애의 탓으로 치부하고 지냈다. 미국 생활을 다 합쳐서 5년 넘게 하고 있지만 결국 느는 것은 영어를 못하는 것을 견디는 요령뿐이다. 그걸 좋게 표현해서 영어에 대한 맷집이 늘었다고나 할까.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말자가 좌우명이지만 졸업식에서도 리스닝이 안 되는 데는 그 동안 다져온 맷집도 소용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영어로 공부도 마치고 미국 라디오 방송의 프로듀서까지 했으니 지난 2년이 얼마나 고행이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제 보상을 받을 때다. 자전거 여행이 그것이다.

내게 지금 이 시기는 후반전을 시작하기 전 하프타임이다. 전반전은 당위의 세계였다. 내가 도덕적인 인물은 결코 아니지만 인생의 전반전은 남들이 고통을 받고 힘들게 지내는데 모른 척 하기가 어려워 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던 시기였다. 훌륭한 친구들처럼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한 건 아니었다. 기자직은 내 한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사회적 실천이 아니라 밥벌이가 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러면 굳이’ 하면서 직장을 관뒀다. 그리고 앞으로는 해야 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작정했다. 자전거여행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물론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나도 이 여행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바쳤다. 그렇게 해서 돈과 시간을 모아서 한 바퀴 한 바퀴 벌어서 페달을 돌린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할 때의 고요함지루함보다 심연으로 빠져드는,
집착과 잡념이 사라지고 가라앉는 느낌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왜 자전거여행이 하고 싶은지 짚이는 데가 있다. 나는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더 좋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으면 쓰러지는 굴렁쇠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은타가, 저녁 먹어라” 소리쳐 부를 때까지 밖에서 놀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집안에 못 붙어 있는 아이였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특히 운동을 좋아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더욱이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기쁨은 안다. 그걸 유성에 있던 군대 훈련소에서 깨달았다. 몸을 움직여도 억지로 움직이는 것, 예컨대 기합 같은 건 싫을 줄 알았다. 어느 날 훈련 교관이 피티(PT) 체조를 시키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한 천 번쯤 했을 때 동료 훈련생들이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 교관은 그만하라는 얘기를 단순히 까먹고 퇴근한 듯했다. 270여명의 훈련생들이 하나 둘 나중에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못하겠다면서 포기하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는 게 더 좋다

나는 계속했다. 기합이 아니라 하늘을 날고 싶어서 날개 짓을 계속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단순한 동작을 수없이 반복할 때 찾아오는 그 고요함. 지루한 게 아니라 심연으로 점점 들어가는 듯한 느낌. 집착과 잡념이 사라지고 착 가라앉는 느낌.

달리기가 그랬다. 처음엔 동네 한 바퀴, 먼 동네 한 바퀴, 하프 마라톤, 풀 코스 마라톤, 4시간, 3시간50분, 3시간30분… 수영도 그랬다. 처음엔 25m, 50m, 100m, 200m… 그리고 500m를 안 쉬고 한번에 할 수 있게 됐을 때 갈증만 없으면 끝없이 수영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이 나를 스쳐가지 않고 내가 세상을 통과해 간다는 느낌.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자전거여행, 그것도 100일 동안 페달을 밟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어떤 운동보다 규모와 강도가 큰 것이어서 졸업 선물로서, 인생 후반부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일과 공부를 억지로 하는 동안 묵묵히 뒷받침해온 몸에 대한 풀 서비스다. 하지만 그게 범죄의 소굴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라면 혹은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정신착란에 걸릴 지경으로 가는 길이라면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구글 검색결과는 그런 걱정들을 일거에 소탕해버렸다. 아니,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이라는 게 무슨 새삼스러운 일이라도 될까 싶게 많은 사람들이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자전거로 오고 간 기록들이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가슴을 쓸어 내리는 동시에 김이 팍 샜다. 안전하긴 한 모양인데 새로운 모험을 벌인다고 떠벌인 자신이 민망했다. 몰라서 그렇지, 알면 그렇게 두려운 일이 아닌 그런 종류의 시도였다. 애초에 북극 횡단이나 에베레스트 산 정복 같은 모험도 아니었다.

곧 이어 같은 컬럼비아에 사는 주디 크누드슨(Judy Knudson)을 수소문해서 만났다. 만 65살의 할머니여야 했다. 하지만 중년의 여성이 나타났다. 담배를 끊은 뒤 6개월 만에 불어난 몸을 견디지 못해 차고에 세워둔 자전거에 올라탔다. 3㎞도 가지 못해 돌아왔다. 그 때가 1996년 56살 때의 일이다. 간호사출신인 그녀는 그 전에 특별히 운동해 본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나보다 더 늦게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한 셈이다. 하지만 그 성장속도가 눈부시다. 안장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캔자스 시티에서 세인트 루이스까지 그러니까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단숨에 주파했다. 그리고 4 년 뒤인 2000년, 만 60살에 6400㎞를 달려 미국을 횡단했다. 서부 해안 워싱턴 주의 에버렛(Everett)에서 출발해 58일만에 동부 해안 매사추세츠주의 낸터킷(Nantucket)에 도착했을 때의 소감을 물었더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 대신 이렇게 말했다.

60살에 미국 횡단한 ‘아줌마’

“자전거를 되돌려 다시 서부 해안을 향해 가고 싶었다.”

얼마나 자전거 타는 게 좋길래 횡단을 하고도 모자라서… 그녀는 “이제는 멈추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눈물도 흘렸는데 흘린 이유가 딴 데 있었다. 그 동안 함께 여행 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헤어지기가 싫어 그들과 함께 서부 해안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는 것. 남편이 낸터킷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38명의 일행과 여행을 함께 했다. 비바람 속에서 거친 숙식을 함께 하며 싹튼 동지애가 오죽했을까. 우린 예비군 훈련 사흘만 가도 평생 친구를 만난 것처럼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러는데…

나는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당간부들을 자전거 원정 여행에 안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소련의 경우 미국보다 몇 배나 더 넓은데 그쪽 대서양에서 이쪽 태평양까지 합숙을 하며 자전거 여행을 시켰으면 동지로서의 우애가 크누드슨이 경험한 것의 몇 배는 됐을 텐데. 내가 전편에서 자전거타기를 혁명에 비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크누드슨은 역시 한번으로 모자라 이듬해인 2001년 만 61살의 나이에 5600㎞ 구간을 따라 55일만에 미국을 횡단한다. 좀처럼 멈출 수가 없다. 크누드슨은 처음으로 내게 자전거 미국 횡단의 구체성과 실현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크누드슨과 나는 다르다. 크누드슨의 자전거여행은 자선기금 모금의 성격도 띠고 있어서 지원차량이 따라붙어서 짐을 나르고 숙식을 해결해주고 코스를 안내해줬다. 하지만 난 맨땅에 헤딩해야 한다. 나 혼자 준비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후배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두건 하나만 이마에 두르면 나도 기금을 모으고 매스컴도 탈 수 있을 거라며 자기가 영어와 스페인어 두 가지 말로 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사양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안 믿어서가 아니라 이번 여행은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히 나를 위한 여행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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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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