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6
해 떨어지기 전에 오라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몇 시까지 가면 괜찮겠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오후 4시라고 했다. 그러나 도착한 시각은 6시반.
버지니아 주 샬럿츠빌에서 쿠키 레이디(Cookie Lady)라고 불리는 준 커리 (June Curry)의 집까지는 산길이다. 거리는 64㎞밖에 안 됐지만 가파른 산길이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미국 자전거 횡단이라는 도전의 뼈저린 실상을 깨우쳐주는 첫 관문이다. 미 동부를 동서로 가르는 최대 산맥인 애팔래치언 산맥의 지산인 애프톤 산 거의 정상에 그 여자의 집이 있다.
그가 오는 길을 일러줬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가는 동안 내내 헤맬까봐 걱정했다. 어드벤처 사이클링 어소시에션(Adventure Cycling Association)이 만든 지도에는 언덕 위에 집이 있다고만 나와 있다. 마음은 초조하지만 가도가도 언덕의 끝은 나오지 않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섰을 때 허름한 자전거가 보이고 그 위에 ‘Water for Bikers’(라이더용 식수대)라는 간판이 보였다. 조금 더 가자 ‘June Curry Cookie Lady(준 커리 쿠키 레이디)’라는 문패가 나타났다.
1976년 미 건국 2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을 횡단하던 라이더들이 이곳을 지나다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들어서 더 못 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지방도로 750번 길가에 있는 붉은 벽돌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후 근 30년 간 이곳이 자전거 혁명세력의 보급기지가 된다. 그 때가 그 여자의 나이 55살이었다. 그는 라이더들에게 과자를 구워줬고 숙식을 원하면 자신의 집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바이크 하우스’라고 이름을 지은 별도의 붉은 벽돌집에 재워줬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이 쿠키 레이디다.
벨을 눌렀더니 지금은 29년의 세월이 흘러 84살의,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된 쿠키 레이디가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왔다. 먼저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하룻밤 묵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자 열쇠를 주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라고 말했다. 청력에 문제가 있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대화가 시작된다.
“어디서 왔느냐?”
“코리아에서 왔다.”
“어디?”
“코리아.”
애팔래피아 산맥 정상에 홀로 사는 84살 ‘준 커리’
미국횡단을 하는 라이더들의 고빗길에서
30년간 과자를 구워주고 숙식을 제공했다
그녀의 집은 혁명의 보급기지가 됐고
그녀에게는 ‘쿠키 레이디’라는 별명이 붙었다
내가 영어는 신통찮지만 두 번 말하면 알아 듣게 할 정도는 된다. 하지만 할머니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철자를 말해보라고 해서 철자를 말했는데도 소용없다. 어디 근처에 있는 나라냐고 물어서 아시아에 있다고 하니 아시아에서 왔느냐고 깜짝 놀란다. 아시아의 어디냐고 해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다고 하자, 그럼 섬나라냐, 아니 반도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가 한국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한국인을 처음 본 것이었다. 뒷집에 사는 호프(Hope)에게 전화해서 생전 처음 보는 한국인을 같이 구경하자고 해서 그 여자도 애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3년 전 뇌졸증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데다 얼마 전에 고양이에게 밥을 주려다 계단을 헛디뎌 오른손 팔목마저 부러졌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바이크 하우스까지도 안내해주지 못하고 말로 설명을 한다. 가만 들어보니 그의 말은 알아들을 만하다. 그가가 왜 일찍 오라고 했는지를 설명하는데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 올걸. 샤워시설이 있는데 물을 태양열로 덥히기 때문에 물이 식기 전에 샤워하라고 일찍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못 알아들어 혹시 해가 떨어지면 문을 안 열어준다는 얘기일지 모른다고 부리나케 왔으니…
생전 처음 보는 한국인
이 첨단 태양열 방식의 샤워 시설은 무슨 영문인지 집 밖에 있다. 물을 틀었을 때 그제서야 깨달았다. 태양열 전지가 있어서 태양열을 가둬놨다가 물을 덥히는 방식이 아니라 해가 떠있을 때 그 열기로 물을 덥히는 원시적 방식. 그래서 빨리 오라고 한 것이다. 물이 미지근하지도 않다. 순간적으로 꾀를 내 빨래와 목욕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옷을 입고 샤워를 했다. 한데 오히려 찬물이 착 달라붙어 더 춥다. 옷을 부랴부랴 벗었더니 길에서 보일까봐 몸놀림이 더 빨라지고 두 손이 서로 엉킨다.
바이크 하우스의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자 이곳이 단순한 혁명의 보급기지가 아니라 혁명 기념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1976년 이후 1만1천명이 여길 다녀갔다고 한다. 미국 50개 주 전체는 물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웨덴 스페인 뉴질랜드 베네주엘라 등 세계각지에서 온 라이더들이 이 하우스를 ‘참배’했다. 이곳을 다녀간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고향에 도착해서 그림엽서들을 보내 모두 방 네 칸인 이 집의 사면을 온통 도배하고 있다. 신문에 실린 자신들의 횡단기들도 보냈다. 쿠키 레이디는 즉석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라이더들의 모습을 사진첩으로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다 라이더들은 기념이 될 만한 흔적들을 남겼는데 타이어에서부터 운동화, 물통, 자물쇠, 모자, 티셔츠, 책. 누군가는 헬멧을 남기고 갔는데 헬멧 안 쓰고 이 산맥을 어떻게 내려가거나 넘어가려는 심산이었는지 알 수 없다. 너무 감격해서 제정신들이 아니다. 페달, 펌프, 안장, 바퀴덮개… 그리고 라면. 라면은 부피가 커서 안 넣어왔는데 비록 맛이 심심한 일본 라면이지만 심심 유곡에서 발견하는 기쁨이 이만저만 아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혁명기념관’의 알알한 사연들
고단해서 일찍 자려고 팻 차일즈 (Pat Childs)라는 여성이 보낸 사진첩을 들고 소파에 누웠다. 자신의 핏속에 자전거 여행에 대한 동경이 흐르고 있다고 믿던 젊은 여성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자전거 여행으로 안내하는 리더로 활약했다. 아름다운 사진들을 재치 있는 설명을 함께 읽으며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잠이 달아난다. 그러다 갑자기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사진이 나온다. 그의 휠체어는 털이 많은 개가 끌고 있다. 그 당황스런 전환에 뚜렷한 설명도 없다. 그는 어느 날 동맥경화증에 걸려 다리가 마비돼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그래서 개에 의존해 움직이는 불구의 몸이 됐다. 이후 그는 인도견들을 훈련하는 전문가가 돼 그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완전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붙어있다. 그의 사진들은 어떤 좌절이나 슬픔도 보여주지 않는다.
벽촌에 살기 싫다며
도시로 떠나버린 남편
15년간 소식이 끊긴 딸
그녀는 가족을 잃었지만
대신에 세계를 얻었다
팻 차일즈는 77년 이곳에 머문 인연을 소중히 여겨 89년에 사진첩을 쿠키 레이디에게 보냈다. 아울러 그의 부모가 쓰던 독특한 스타일의 2인승 자전거(tandem)도 기증해 바이크 하우스에 전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한푼 두푼 기부했고 그는 93년 라이더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동지들(fellow bikers)은 한번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평생 페달을 밟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게 된다는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지금 나는 동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 그 언덕들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지만 그 소망은 항상 있다. 나를 위해 바퀴를 굴려다오.”
이 바이크 하우스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켜켜이 쌓여 있지만 역시 주인공은 쿠키 레이디다.
“물을 주면서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더니 오리건 주까지 간다고 해서 농담하는 줄 알았다.”
커리의 회고담이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알고 그들을 보다 잘 대접해야겠다고 맘먹었다.”
그의 선행은 신문과 잡지 기사로 수없이 많이 소개됐다. 어드벤쳐 사이클링 어소시에이션은 ‘Cookie Lady Award(쿠키 레이디 상)’을 제정해 그처럼 라이더들을 도운 사람들을 해마다 선정해 표창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전거를 탄 적이 없다. 사실 이 가파른 산길에서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지금 사는 벽돌집에서 태어나 군인인 남편을 따라 한때 캘리포니아, 미시간 주에도 살아봤다. 남편이 2차대전에 참전, 버마(미얀마) 전선으로 떠난 뒤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와 그 이후로는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 버마 전선에서 싸운 남편은 무사 귀환했으나 벽촌에서 살기 싫다며 세 살 난 딸과 그를 남겨둔 채 도시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신분이 이혼녀인 것을 알게 됐다. 딸도 성장한 뒤에는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딸의 소식을 들은 지 15년도 더 됐다고 한다.
“라이더들이야말로 내 가족”
그래서 그는 아버지 해롤드 해븐(Harold Haven)과 함께 살았다. 함께 라이더들을 돌보던 아버지는 90년 9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기억한다. 아버지가 병마에 쓰러져 휠체어를 타고 집에 갇혀 있을 때 일가친척들은 잠시 방문해서 안부만 묻고 떠났다. 어느 날 라이더가 찾아와 바깥 공기를 쐬고 싶으냐고, 저 산이 보고 싶으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그렇다고 하자,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문턱에 판자를 깔아 통로를 만들어줬다.
커리는 한 달에 노후연금(social security)으로 불과 292달러(30만원)를 받는다. 그가 젊은 시절 연금에 집어넣은 돈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떠난 뒤 잠시 가게에서 일했지만 어머니의 병을 구완하기 위해 그만 둔 뒤 그는 무려 43년을 다른 가족들을 간호하는데 바쳤다. 뇌졸증을 일으킨 작은 아버지와 암에 걸린 작은 어머니… 그들이 다 세상을 떠난 뒤 정작 그가 아플 때 간병해줄 일가친척이 없다. 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감격시킨 사람들은 다름 아닌 라이더들이었다. 병실에는 우편엽서와 편지, 인형, 꽃들이 쇄도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도록 미국의 사회보장 제도가 돌아가는지. 그의 의료보험료는 한달 385달러(39만원). 노후연금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살아야 한다. 그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지만 뉴욕 시의 비싼 동네에 산다는 딸은 “여기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어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작은 아버지들이 자식이 없어 유산으로 남겨준 작은 액수의 돈으로 그 차액을 보전하며 산다. 재산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뒷집에서 바이크 하우스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바이크 하우스는 내 생명의 일부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야말로 내 가족이다.”
라이더들도 그를 가족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미국 횡단 후 결혼한 사진이나 득녀득남한 사진, 심지어 철자 알아 맞추기 대회에서 자신의 자식이 우승한 표창장까지 산골에 사는 이 노파에게 보내올 리가 없다.
그는 가족을 잃은 대신 세계를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도 가족이 생겼다. 헤어져야 하는 날 아침 그는 내 손을 두 번이나 잡으며 안전하게 여행을 하라고 기원했다. 자전거에 짐을 꾸려 집밖을 벗어나는데 거동이 불편한 그가 나와서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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