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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7 19:44 수정 : 2006.01.18 17:21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8


밤새 비가 내렸다. 빗방울들이 작은 구슬들로 텐트의 지붕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어제 통나무집에 들어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전날 비를 맞으며 버지니아주 부캐넌(Buchanon) 근처에 있는 캠프장에 도착했다. 만약 주인이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서 이렇게 가파른 길로 10㎞나 떨어져 있다는 말을 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제퍼슨 국유림의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파란 새가 차에 깔려 죽어 있고 또 다른 파란 새가 죽은 새를 부리로 쪼면서 깨우려다 내가 지나가니까 퍼드득 날아간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해서 비를 피하기 위해 텐트 사이트 대신 통나무집을 물어봤다.

우체국 직원 복장을 한 주인아저씨가 45달러에다 세금 다 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인정머리 없는 대답해 속이 상해 그냥 비속에 텐트를 쳤다. 아마 ‘놀라운 인생 캠프장(A Wonderful Life Campground)’이라는 캠프장 이름에 스스로 현혹됐나 보다. 괜히 과잉 기대를 품고 실망한 것. 캠프장 주인들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대자연을 벗하며 살고 싶은 이들이고 타협의 여지가 많다. 다른 부류는 모텔을 차릴 만한 여유가 없어 산중까지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악착같이 돈을 벌어 도시로 복귀할 생각밖에 없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을 청했는데 잠이 올 리 만무하다. 빗소리는 마치 팥죽이 끓는 것처럼 부글부글 소리를 냈다. 아침에는 말끔히 개었으면…

날이 희부염 밝아와서 일어나보니 아침 7시. 여전한 빗소리. 나가기가 싫었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빗방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스파게티 국수에 고추장볶음으로 비빔면을 만들어 먹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한참 고민했다. 이 비를 맞고 가느냐 마느냐. 선택은 분명했다.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다.

들판에 비가 내린다. 철로에 비가 내린다. 소도 비를 맞는다. 들꽃도 비를 맞는다. 안경에 빗방울이 모자이크 된다. 열탕에 들어갈 때 처음에 손부터 집어넣어보고 열기에 놀랐다가 점차 몸을 밀어넣게 되듯이 찬비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한기에 움츠리지만 흠뻑 젖으면 비를 받아들이게 된다. 체온은 페달을 밟으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유지한다. 물기에 젖은 길은 투명하게 빛난다. 일단 엉망진창이 되면 모든 게 편해진다. 언제 이렇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탄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파격의 즐거움은 곧 중대한 시련을 겪는다. 크리스천스버그(Christiansburg)로 가는 길은 신앙심이 없으면 오르기 힘든 길이다.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선다. 특히 캐터바(Catawba)까지 가는 지방도로 779번은 화물차들과 콘크리트 믹서가 돌아가는 대형차들이 휩쓸고 지나갔다. 생명줄인 백색 선을 타고 가는데도 화물차가 지나가면 길 밖으로 밀려난다. 화물차에 이는 물보라에 시야마저 흐려진다.

길 자체도 험준하기보다는 험악하다. 분명 가학성 음란증 환자가 설계한 길임에 틀림없다. 끊임없이 왜 이 길을 타고 넘어야 하는지 회의하게 만들고 회의하는 만큼 의지가 약해진다. 페달을 한 발 밟으면 딱 한 바퀴만 돈다. 다리를 쉬게 할 수가 없다. 핸들에 붙은 계시기에는 시속 3㎞가 찍혔다. 걸어도 시속 4㎞는 된다. 사타구니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밟는데도 걷는 것보다 느리다.

내 등 뒤에서 “어이, 우리 똑 같은 걸 하고 있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까지 9일 동안 한번도 구경 못한 라이더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나처럼 밥 약(Bob Yak) 짐수레를 끌고 가고 있다. 너무 반가워서 “어디로 가느냐”고 말을 붙이니까 손으로 서쪽을 가리키면서 휙 스쳐 지나갔다. 같은 혁명동지끼리 이럴 수가.

시속 3km, 걷는 것보다 느리다

그를 좇아가려고 무리하게 속력을 낸 게 화근일까 뒷바퀴가 멈췄다. 뒷바퀴 덮개가 빠져서 바퀴에 달라붙었다. 짐수레를 자전거에서 분리하고 뒷바퀴를 빼서 덮개를 조정한 뒤 다시 올라탔다. 자전거는 항상 견디기 어려우면 소리를 낸다. 맞바람이 불면 비파소리와 같은 곡 소리가 바퀴살에서 난다. 뒷바퀴 덮개가 바퀴에 달라붙으면 쉬익 쉬익 소리가 난다. 진작 그 소리를 듣고 처치했어야 했는데 늦었다. 다시 고갯길을 오르다 뒷바퀴 자체가 빠져버렸다. 궤도에서 이탈한 바퀴 덮개가 뒷바퀴를 밀어내버린 것.

비는 쏟아지고 갈 길은 먼데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바퀴 덮개를 떼어버리자. 가방에서 필요한 공구들을 챙겼다. 기계치라는 말이 있다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단순한 고장도 미적분을 푸는 것 이상의 난해한 도전이다.

휴먼 <파워드 비어클 저널>의 에디터인 버논 포브스는 그런 내게 기계 대하는 법을 강의했다.

애팔래치아 넘는 길 중 최악 난코스
끝없는 오르막 따라 크리스천버그로 간다
빠져버린 뒷바퀴와 한동안 씨름
“태워주겠다”는 자동차 세력의 꾀임 뿌리쳤다
페달 한번에 딱 한바퀴씩 돌려 128㎞를 나아갔다
나를 제치고 간 라이더를 여관에서 만났다
그래 느리면 어떤가 길에 좀더 머무르면 되지

“먼저 심호흡을 한다. 문제가 쉽게 풀릴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도구를 가지런히 배열한다. 고치는 순서를 머릿속에 그린다. 순서에 따라 시도해본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는 덧붙였다.

“시도해도 안 되면 매달리지 말고 그 자리를 뜬다. 좌절감에 압도되면 영원히 기계치로 남게 된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시도한다. 그러면 그 전에 보이지 않던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 말이 없는 기계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계에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눈비 속 3개월을 종주한 미국 여성

근데 나로서는 이 자리를 뜰 수 없다. 자전거를 거꾸로 세우고 공구를 짐에서 꺼냈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뒷바퀴로 갔다. 비는 목덜미에 화살이 돼서 파고든다. 중년 여성 두 명이 차들을 세우고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픽업 트럭을 몰던 두 번째 여성은 자전거 가게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해서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한번 차를 타기 시작하면 내 다리와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날 나중에 주유소에 만난 한 중년 남성은 내 자전거에 백미러가 없는 것을 보고 백미러를 달 수 있게 가게까지 태워주겠다고 해서 또 한번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용하게도 자동차 세력의 음험한 꾀임을 뿌리쳤다.

바퀴 덮개를 마침내 떼어냈을 때의 내 표정을 봤어야 했다. 뿌듯해서 페달에 가속도가 붙는다. 오늘은 캠핑을 포기하고 온욕을 할 수 있는 여관에 가자. 갑자기 탄탄대로다.

캐터바에 있는 주유소에서 애팔래치언 트레일을 종주하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이 트레일은 조지아 주에서 시작해 메인 주까지 3200㎞의 산길이다. 원래 이 트레일을 종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트레일을 종주한 미국 작가의 책도 번역하기까지 했는데 문제는 아무리 백수라도 이 트레일을 종주하는 데 소요되는 6개월을 낼 수 없었다. 더구나 우연히 알게 된 환경단체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에서 일하는 빌 프리스(Bill Freese)는 내게 자전거 여행을 권하면서 “애팔래치언 산맥을 종주하는 사람보다 훨씬 정상적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의 뉘앙스가 묘했다.

미시간 주 출신인 리비(Libby)라는 이 여성은 트레일을 3개월째 걷고 있는 중. 눈비를 뚫고 걸어왔는데 앞으로도 3개월이나 더 가야 한다. 프리스의 말과는 달리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간밤에 그렇게 비가 왔는데도 마치 비에 씻긴 사과처럼 쌩쌩했다. 내 짐수레만큼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끄는 것도 아니고 어깨에 메고 혼자 걷고 있다. 그녀는 여행 도중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애팔래치언 산맥의 종주를 시도하는 사람은 한해 3천명 정도. 그 중 300여 명만이 한번에 끝까지 간다고 한다. 미국 자전거 횡단을 시도하는 사람은 그에 비해 1/6인 500명 정도. 성공률은 모르겠다. 만약 내가 미국 횡단에 성공한다면 그 무렵에 리비도 종주를 끝내게 될 것이다. 서로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자전거 여행을 할 때 동네사람에게 길을 묻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동네사람들은 길이 자신의 손금 보듯 훤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에 대한 감각과 구체성을 잃어버린다. 글루 가서 요렇게 돌면 그 여관이 나와. 주유소에 만난 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도가도 나오지 않는다. 몇 번이나 멈춰서 확인했지만 그 남자가 얘기한 여관은 안 나왔다. 이왕 내친 김에 크리스천버그까지 가버리자. 오기였다.

지방도로 785번 가에는 주유소가 없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적의 병참 창고인 주유소를 보급선으로 활용하는 허허실실 전법을 구사하고 있는 중. 주유소에서 빵과 물을 사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하는 캔 맥주를 샀다. 물은 다 떨어졌는데 주유소는 두 시간 째 보이지 않는다. 라이더들은 한 시간에 물 한 통을 소비한다. 쏟아지는 비에 혀를 내밀었지만 갈증만 더한다.

벌떡 서 있는 듯한 오르막길

기진맥진한 끝에 크리스천스버그에서 6㎞쯤 떨어진 엘리트(Ellett)에서 주유소를 만나 충전한 뒤 마지막 등정에 나섰다. 지방도로 723번은 비에 깨끗이 씻겨 혀로 핥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깨끗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해도해도 너무 했다. 산세가 얼마나 깊은지 길가에서 사슴이 노려보다가 껑중껑중 숲으로 뛰어가고 비버도 꿈틀댔다. 애팔래치언 산맥을 넘는 길 중 가장 험준하다는 평이 허명이 아니었다. 내려서 자전거를 밀고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길이 좁아 뒤에서 오는 차에 치일 우려가 있다. 거의 무의식 속에서 크리스천스버그에 진입했다.

그리고 마지막 절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하야 라이더들 사이에 ‘Danger Hill(위험한 언덕)’로 불리는 고갯길. 맙소사. 길이 벌떡 서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 기어를 최저로 낮추고 올라가는데도 똑바로 올라갈 수 없다. 나를 스쳐 내려간 차가 밑에서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미끄러져 찍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빙 돌아버린다. 집밖에 나와 있던 한 아이가 “힘들지?” 한 마디 하고 들어간다.

갈짓자로 언덕을 타고 올라가다 자전거가 길 밖으로 빠져버렸다. 길에 빼내 다시 올라타는데 이미 계기를 상실한 자전거는 짐수레의 무게에 못 이겨 밑으로 내려간다. 자전거를 밀지는 않겠다는 결심이 무너지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나머지 20m는 그렇게 올라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핸들에 달린 컴퓨터에는 80마일, 128㎞가 표시됐다. 128㎞ 중 20m를 민 것으로 자족하자.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아침 8시에 시작해 오후 7시가 됐으니 꼬박 11시간 비를 맞았다. 허리와 다리 그리고 어깨 근육이 뻣뻣해진다. 모텔에 들어가 가방을 열어보니 짐도 다 젖어 갈아입을 마른 옷도 없다. 그런데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욕조에 누웠을 때 비참한 기분이 드는 대신 담뿍 차오르는 느낌이다. 점점 내가 점점 라이더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려다 여관 마당에서 어제 나를 스쳐갔던 그 라이더를 마주쳤다. 그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빨리 간다고 갔는데 멀리 못 가고 같은 여관에 묵은 것. 그래 느리면 어떤가. 오히려 좀더 길에 더 머무를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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