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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주 다마스커스 입구에서 만난 하이커들. 왼쪽에 있는 두 사람이 조안 박과 그의 약혼자 조슈아 쿡. 재미교포인 조안은 이날 컨디션이 안 좋아 하루를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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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숲속 자비로운 내리막길 따라 하이커들 우글거리는 다마스커스 ‘그곳’으로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주하는 하이커들은 어색한 침묵을 싫어해 혼자 걷지만
사람과 마을이 그리워져 제정신을 잃는다.
약혼자와 함께 온 재미동포 하이커 ‘조안 박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9
쿠키 레이디의 바이크 하우스가 바이크 라이더들의 전당이라고 한다면 버지니아 주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곳(The Place)’은 하이커들의 양산박이다.
오전 8시반 버지니아 주 위더빌(Wytheville)에서 출발, 100㎞를 달린 끝에 오후 4시 버지니아 주 다마스커스(Damascus)에 도착했다. 길은 우거진 숲 속으로 나 있어 볕을 가렸고 자비롭게 경사져 한번도 앞 기어를 저단으로 내리지 않아도 됐다.
상쾌한 기분으로 다마스커스로 들어서는데 하이커 세 사람이 모여 있다. 그 중 두 명이 재미교포인 조안 ‘케이지(KG)’ 박과 약혼자 조슈아 ‘준버그’ 쿡. 미국에 2백만 명의 한민족이 살지만 이렇게 외진 곳에서 마주치면 반갑다. 미국 벽촌의 낡은 모텔에서 텔레비전이 골드스타인 것만 봐도 반가운 판이다. 조안은 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다. 순간 민족의 유대가 복원된다.
뉴욕에 사는 그들은 종주를 마친 뒤 결혼할 예정이라고 한다. 애팔래치언 종주는 결혼에 앞서 관계의 내구성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보통 남녀가 종주를 같이 하면 처음엔 남자가 짐의 3분의 2를 메고 가다가 하나씩 넘겨줘서 여행 중반에 이르면 무게가 거의 같아진다고 한다.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어떻게 하남. 힘든데. 그래도 남녀가 같이 가면 종주 성공률이 높다고 한다. 여성은 자신이 더 짊어져야 하는 무게로 남자의 인간성을 판단하지 않는 모양이다. 조안의 배낭을 메어 보니까 간단치 않다. 한국여성의 강인함을 입증하듯 벌써 장래의 남편과 별 차이 없는 무게를 소화해 내고 있다.
그녀의 중간 이름이 케이지인 것은 코리언 걸을 뜻한다. 하이커들은 서로 외우기 쉽도록 별명을 짓거나 지어준다. 그의 약혼자가 벌레이름인 준버그인 것은 필시 뭔가 약점잡힐 일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별명이 ‘치즈 팩토리(Cheese Factory)’로 암모니아 가스를 자주 발사한 탓이다.
그들과 헤어져 다마스커스 연합감리교회가 운영하는 ‘그곳’이라는 이름의 호스텔을 찾아갔다. 이름이 ‘그곳’인 것은 종(애팔래치언 트레일)과 횡(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교차하는 십자로의 중점이기 때문이다. 기막힌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길이 엇갈리는 하이커들과 바이크 라이더들은 거의 같은 무렵인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여행을 끝내게 돼 있다. 강인한 하이커들은 하루에 평균 32㎞를 걷고, 일반적인 바이크 라이더들은 평균 100㎞를 달린다. 여기서 남은 거리를 계산하면 최종 목적지까지 하이커들은 3개월. 바이크 라이더들은 2개월 반 정도가 남아 있다.
‘그곳’에는 하이커들이 우글거렸다. 입구에 자전거를 집 안에 들이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는 것도 그들의 우위를 입증하는 증거다. 바이크 라이더는 어디를 가든 자전거를 들고 들어간다. 밖에 자전거를 두라는 말은 한 다리를 놔두고 들어오라는 말과 같다.
호스텔은 원래 이층집의 방방마다 이층침대들을 십수 개 둔 것에 불과하다. 관리인도 없지만 화장실, 부엌 할 것 없이 깨끗하다. 문간방을 골라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자전거를 밀어 넣었다. 조금 있으니까 중년 남자가 들어와서 다른 침대로 갔다. 인사를 하는데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다. 완전히 지쳐서 오히려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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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주 다마스커스 연합감리교회가 운영하는 ‘그곳(The Place)’ 호스텔 응접실에서 하이커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두 사람이 폴(오른쪽 끝)과 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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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고 삭은 발냄새에 혼수상태
다마스커스는 애팔래치언 하이커들에게는 버지니아 주에 입성해서 처음으로 접하는 문명의 세계다. 조지아 주 스프링어 마운튼에서 400마일(640㎞)을 걸어야 이곳에 도착한다. 이때쯤이면 애팔래치언 트레일 종주라는 도전의 실상을 느끼고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 심각한 고민들에 빠진다. 호스텔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가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연락하라는 전화번호가 붙어 있다. 이 유혹에 넘어가는 하이커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너무 친절해도 탈이다.
이 사나이에게 종주의 북쪽 끝인 메인 주의 캐터딘까지 갈 거냐고 물었더니 중간까지만 갈 거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등산화를 벗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일주일 간 등산화 안에서 절고 삭았을 그 발 냄새를 10분간 맡고도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화생방전 시간에 가스마스크를 안 써도 되는 사람일 것이다. 황급히 옆 응접실로 피했다.
응접실에는 폴과 벅이 소파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러서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22살과 23살이다. 젊은 사람이 수염을 기르면 나이 들어 보이고 나이든 사람이 수염을 기르면 나이를 알기 어렵다.
처음엔 요란한 싸이클복을 입은 나를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던 두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대화에 굶주린 건 나보다 그들이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두 사람 다 대학 졸업 기념으로 종주하고 있는데 아이오와 주 출신의 벅은 중간까지만 하고 관두겠다고 말했다. 차라리 집 근처에서 낚시하면서 걷는 게 백 번 낫다고 말했다. 캐나다 출신의 폴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장기전에 대비, 근육을 키우고 있는 중. 끝까지 갈 사람이다.
75살의 할아버지 하이커
폴은 하루에 평균 6달러를 지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종주를 시작한 뒤 1달러 남짓 쓰고 있다고 말했다. 보통 음식값인데 사람들이 과자나 파스타들을 남겨놓아 그것을 주워 먹으며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모아온 과자들을 일일이 계량해서 지퍼가 달린 작은 비닐 백에 담고 있다. 이게 내일 아침, 이건 내일 점심 하면서. 내가 지켜보자 한 끼 분량의 봉지 하나를 던져줬다.
그는 텐트 없이 슬리핑백에서 잔다고 한다. 벅은 텐트 대신 타프(Tarp)라는 천막을 나무 사이에 치고 잔다. 익히 듣던대로 애팔래치언 트레일에 있는 대피소에는 쥐들이 들끓는다고 한다. 쥐들이 자는 사람들의 몸을 타넘을 뿐만 아니라 배낭 안에 들어가 온갖 것들을 헤쳐놓는다고 한다. 폴은 캐나다에 있는 친구들이 한국에 많이 갔다면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면 왕처럼 대우받고 대학 학비 빚진 것도 다 갚게 된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그들과 모처럼 멕시칸 식당에서 포식하는데 그들이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애팔래치언 트레일을 6년 연속 종주하고 지금 일곱 번 째 종주하고 있는 잭”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은 진짜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등산’이라고 한 마디하고 입을 다문다고 한다. 내가 흥미로워 하면서 식사 후 그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보겠다고 했더니 두 사람 다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며 “머리에 나사가 하나 풀려 있다”고 말했다. 75살의 할아버지 하이커도 있었는데 마이클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폴이 미리 그에게 가서 한국에서 온 저널리스트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더니 내가 앉아 있는 곳을 멀리 휘돌아 딴 데로 가버렸다.
내가 애팔래치언 트레일 종주를 생각했는데 누가 자전거 횡단이 더 정상적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조언했었다고 말했더니 뜻밖에 폴과 벅 두 사람 다 동의하면서 “정신적으로 불안해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조안의 약혼자 쿡도 “도중에 낙담해서 넋이 나간 사람 많이 봤다”고 말한 바 있다. 멀쩡히 잘 살다가 산에 갇혀 온종일 걸으면서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원래 좀 이상해서 그렇게 온종일 걷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전거 횡단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애팔래치언 종주에는 미치지 못한다. 바이크 라이더들의 짐무게가 보통 15㎏인데 하이커들은 그 정도의 무게를 짊어지고 간다. 바이크 라이더들이 오르막길이라고 불평하지만 그들은 도로보다 훨씬 험하고 꼬부라진 산길을 헤치고 올라간다.
세상을 잊기 위해 걷는다
그들은 같이 걷지도 않는다고 했다. 길도 좁지만 같이 걷다 보면 침묵이 어색해서 끊임없이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혼자 걷다 보면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젊은 사람들은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산행을 떠나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을 잊기 위해 걷는다. 그러나 그들이 하루 종일 보는 것의 99%가 그냥 나무다. 내면으로 탐험하지 않는 한, 나라도 이 짓을 왜 하지 하는 생각에 돌아버릴 것 같다.
애팔래치언 종주는, 그래도, 매일 자동차들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 자전거 횡단보다 안전하기는 하다. 차가 안 다니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보도로만 다니지 않는가. 하지만 젊은 그들은 산에 없는 것들, 사람을, 마을을, 인터넷을, 우체국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여자를 그리워했다. 조안처럼 짝이 있어서 여자가 종주하는 것을 빼고는 여자 단독 산행은 드물다. 폴과 벅은 한달 동안 산에서 여자를 한 명도 못 봤다면서 매일 심하게 냄새 나는 남자들과 대피소에서 몰려 자는데 질렸다고 말했다. 폴은 “여자랑 사귀려는 게 아니고 그냥 남자들만 우글대는 분위기가 싫다”고 했다. 내가 캐타봐에서 리비를 만났다고 했더니 두 눈이 쟁반만해지면서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리비가 무지 예쁘다 했더니 더 바싹 얼굴을 갖다 댔다. 몇 살이냐. 나이는 안 물어봤는데 너랑 비슷한 또래다.(사실은 리비의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그는 반색을 하면서 한 동안 말이 없더니 “한 2주일이면 따라잡겠지” 하고 힘주어 말했다. 리비가 출발 이후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폴은 이제 특수수색대원이 돼 산길에 떨어진 바나나 껍질과 같은 흔적들을 확인하면서 리비의 뒤를 좇게 될 것이다. 폴이 눈에 불을 켜며 밤낮으로 산길을 걷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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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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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마침내 리비를 붙잡았을 때 그가 생각하는 그런 여성상이 아니면, 혹시 그렇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튼튼한 그 역시 실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리비여, 잡히지 말고 어서 걸어라.
늦은 밤 호스텔 바깥 벤치에 앉아 달을 보는데 뒤에서 얘기 소리가 들려서 돌아봤더니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청년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책을 읽으며 혼자서 말하고 있다. 그 역시 하이커다. 하이킹 대신 라이딩을 하기로 한 결정을 새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혼자다. 바이크 라이더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언제 이 청년처럼 될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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